감독
램버트 힐리어 Lambert Hillyer

주연
글로리아 홀든....마리아 잘레스카 백작부인
Gloria Holden....Countess Marya Zaleska
오토 크루거....제프리 가스 박사
Otto Kruger....Dr. Jeffrey Garth
마가렛 처칠....자넷 블레이크
Marguerite Churchill....Janet Blake
에드워드 반 슬론....반 헬싱 교수
Edward Van Sloan....Professor Van Helsing
길버트 에머리....바실 험프리 경
Gilbert Emery....Sir Basil Humphrey
어빙 피첼....산도르
Irving Pichel....Sandor
할리웰 홉스....호킨스 순경
Halliwell Hobbes....Constable Hawkins
빌리 비번....앨버트
Billy Bevan....Albert
낸 그레이....릴리
Nan Grey....Lili
헤다 호퍼....레이디 에스메 해몬드
Hedda Hopper....Lady Esme Hammond

릴리와 백작부인

[드라큘라의 딸]이 나온 해는 1936년. 슬슬 유니버설사가 속편들로 자사 호러 영화들의 재활용을 시작하던 때입니다. 슬슬 누구누구의 딸이니, 누구누구의 신부니, 누구누구의 아들이니, 누가 누구를 만났느니하는 제목을 단 속편 시리즈들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냉소는 거두시길. 이런 영화들 중에서도 흥미로운 작품들은 많았습니다. 유니버설 호러 최고 걸작으로 뽑히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도 그런 속편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드라큘라의 딸]은 어떤 영화일까요? 일단 이 작품은 스토커의 원작을 각색한 마지막 [드라큘라]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브램 스토커가 [드라큘라] 소설에 포함시키려다 빼버린 뒤 나중에 단편으로 독립되어 출판된 [드라큘라의 손님]이 원작이거든요. 원작과 닮은 구석은 별로 없지만 말입니다. 아마 원작에 나오는 돌링겐 백작부인에 대한 언급이 이 영화의 잘레스카 백작부인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죠.

영화의 내용은 오리지널 [드라큘라]에서 이어집니다. 드라큘라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반 헬싱 박사는 제자인 정신과 의사 가스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한 편 마리아 잘레스카 백작부인이라는 신비스러운 귀족 여인이 도착하는데... 네, 물론 이 사람이 드라큘라의 딸입니다. 잘레스카 백작부인은 아버지의 시체를 훔쳐 불사르고 희생자를 찾아 런던 거리를 헤맵니다. 그러다 우연히 파티에서 만난 가스 박사한테서 이런 흡혈귀 증상을 현대 정신 의학으로 치료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드라큘라의 딸]은 전편처럼 고전 취급을 받는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 부당한 취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처럼 걸작은 아니지만 결코 전편에 못미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없어요. 오히려 흡혈귀 영화 장르의 가치만 따진다면 여러 면에서 전편을 능가하기도 합니다.

우선 잘레스카 백작부인이라는 캐릭터부터가 벨라 르고시가 연기한 드라큘라의 평면적인 캐릭터를 훌쩍 넘어섭니다. 잘레스카 백작부인은 이 장르에서 동정적으로 묘사된 최초의 흡혈귀입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잘레스카 백작부인은 별다른 악의 따위는 없는 사람입니다. 백작부인에게 흡혈행위는 질병이나 마약 중독에 가깝습니다. 세상을 정복하려던 아버지와는 달리, 백작부인은 단순히 아버지가 자기에게 뒤집어 씌운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잘레스카 백작부인의 고뇌는 그 뒤로 수도 없이 쏟아져나온 실존주의적 흡혈귀물의 모태가 됩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어딕션]까지 이어지는 이런 종류의 흡혈귀물들은 [드라큘라의 딸]에서 시작된 것이죠.

잘레스카 백작부인의 성적 경향 역시 이후 흡혈귀 영화들에 새로운 문을 열어줍니다. 이 영화에서 백작부인의 공식적인 욕망의 대상은 가스 박사지만, 실제로 백작부인은 늘 여자 희생자들에게 더 끌리는 것 같거든요. 이 영화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부분은 백작부인이 자살을 기도하던 소녀 릴리를 스튜디오로 데려오는 장면입니다. 릴리의 드러난 어깨를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려는 백작부인의 모습에서 동성애 서브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겠죠. 정신을 잃은 가스 박사의 여자 친구 자넷에게 백작부인이 입술을 들이대는 후반부 장면도 그런 해석에 무게를 더하고요. 후에 태어난 레즈비언 흡혈귀들은 모두 카밀라만큼이나 잘레스카 백작부인한테도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분위기 위주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이상할 정도로 비폭력적이죠. 구체적인 폭력은 클라이맥스가 될 때까지 보여지지 않습니다. 영화는 폭력적인 호러보다는 초자연적인 로맨스의 성격이 강합니다.

감독인 램버트 힐리어는 토드 브라우닝이나 제임스 웨일처럼 자기만의 스타일을 과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럴만한 독창성이 있는 감독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1936년이면 벌써 유성 영화의 테크닉이 무르익은 시대라 이 영화엔 전편의 서툰 터치는 없습니다.

영화는 종종 뜻밖의 시적 터치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잘레스카 백작부인이 불타는 아버지의 시체 위에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던지는 장면을 들 수 있죠. 십자가라는 기독교 상징으로 저주의 고리를 끊으려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상징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해 외면하는 백작 부인의 모습은 후대 실존주의적 흡혈귀의 미래를 보는 듯 합니다.

잘레스카 백작부인 역의 글로리아 홀든 역시 기억할 만한 흡혈귀 배우입니다. 홀든은 위엄있고 우아하며 종종 아주 깊은 호소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그 사람을 쫓는 인간들이 오히려 더 매정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백작부인의 하인 산도르로 나오는 어빙 피첼도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가스 박사로 나오는 오토 크루거는 별 재미가 없습니다. 캐릭터가 별로 맘에 안들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적어도 제 눈엔 가스 박사가 지나치게 매정한 인간처럼 보입니다. 그게 의도라면 제대로 연기한 셈이지만요. 그는 오히려 여자친구이자 조수인 자넷과 스크루볼 코미디식 치고받기를 할 때가 더 그럴싸합니다. 착한 쪽의 빈약함은 이 영화가 흡혈귀 쪽에 감정 이입된 영화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의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드라큘라의 딸]이 전작의 명성을 넘어설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특별히 놀라지는 않을 거예요. 이 작품은 조금 더 진지하게 감상될 필요가 있습니다. (01/09/03)

DJUNA

기타등등

1. 레이디 에스메 해몬드로 나오는 헤다 호퍼는 저명한 할리우드 가십 칼럼니스트입니다.

2. 영화를 보다보면 배우들한테서 현대 할리우드 배우의 이미지가 종종 튀어나와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글로리아 홀든은 안젤리카 휴스턴을 닮았고, 자넷 역의 마가렛 처칠은 가끔 이상할 정도로 기네스 팰트로와 닮아 보이거든요.

3. 원래 이 계획은 제임스 웨일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가 만들었다면 엄청나게 캠피하고 괴상한 작품이 되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