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저스틴 하디 Justin Hardy

주연
폴 힐튼....태너 박사
Paul Hilton....Dr. Tanner
카트린 바크....생물학자
Katrine Bach....Biologist
에이든 우드워드....자료 분석가
Aidan Woodward....Data Analyst
이안 홈....나레이터
Ian Holm....Narrator

백악기 용들

다큐멘터리는 어디까지 현실을 반영해야 할까요? 다큐멘터리의 객관성에 대한 해묵은 질문을 다시 끄집어내는 건 아닙니다. 조금 다른 문제죠. 최근 과학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경향 말입니다.

과학 다큐멘터리는 처음부터 '진실'을 다룰 수 없는 장르입니다. 과학은 진실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당위성 있는 추론과 설명입니다. 그 때문에 과학 다큐멘터리의 경우, 대상을 다루는 방식은 훨씬 융통성이 있지요.

특히 고생물학은 상상력의 보고입니다. 공룡에 매료된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과학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했고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중생대의 괴물들을 만들었습니다. 이 장르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괴물들의 유행들이 지나간 뒤에도 한 동안 애니메이터들의 밥줄이 되어 주기도 했죠.

컴퓨터 그래픽이 등장하면서 이 장르는 조금 더 과격해졌습니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시간이 많이 들었고 현실감도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관객들은 애니메이터들이 생명을 불어넣은 괴물들을 보면서도 그들을 참고 자료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하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훨씬 현실감 넘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컴퓨터 그래픽이 만든 괴물들은 참고자료에서 당당한 드라마의 주연이 됩니다. BBC의 [Walking with...] 시리즈는 더 이상 고전적인 의미의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타당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도전적인 상상력을 반영한 하드 SF 드라마지요.

컴퓨터 그래픽이 발전하면서 이 장르는 점점 더 과격해집니다. 그래도 [Walking with...] 시리즈에 나온 멸종한 동물들은 지구상에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The Future Is Wild]에 나오는 미래 생물들이나 [Alien Planet]에 등장하는 외계 생물들은 전적으로 허구의 존재입니다. 진화라는 매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SF 캐릭터들이죠.

이게 끝이냐고요? 아뇨, 이 장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래도 앞의 시리즈들은 과학이 먼저이고 대상이 그 다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다룰 [환상의 동물, 용]에서는 순서가 바뀝니다. 대상이 먼저이고 과학은 그 다음에 불과합니다.

[환상의 동물, 용]은 과학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죠. 그렇다고 완전한 모큐멘터리도 아닙니다. 적당히 흉내만 내고 있을 뿐, 조금만 봐도 허구임이 분명한 극영화지요.

'영화'는 태너 박사라는 고생물학자가 새로 발견된 티라노 사우르스의 두개골 화석에서 정체불명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나게 커다란 괴물이 티라노 사우르스에 발톱과 이빨 자국을 냈고 심지어 불까지 질렀던 것이죠. 어렸을 때부터 용에 미쳐 있던 태너는 이게 용의 짓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말도 안 되는 이론 때문에 한 동안 따돌림 받던 태너에게 재기의 기회가 돌아옵니다. 루마니아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거대한 동물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게 암만 봐도 용인 것 같다는 거죠. 태너는 두 동료들과 함께 루마니아로 날아가고 그 연구과정 중 그들이 연구하는 동물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태너가 열심히 이 동물의 정체를 밝히려 애쓰는 동안 영화는 [Walking with...]식 전지적 관점으로 용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들은 백악기에 나타나 티라노 사우르스와 싸웠고 운석충돌과 함께 대부분 멸종했지만 수생동물로 진화했던 변종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수룡들은 중국에서 육지로 올라와 우리에게 익숙한 길쭉한 숲 속의 용이 되었고 유럽에서는 서구인들에게 익숙한 날개달린 괴물이 되었습니다. 참, 인류가 용이 만들어낸 불을 훔쳐서 문명을 이룩한 걸 아세요?

영화는 이 용이라는 동물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합니다. 용이 그 작은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건 부레에 수소를 담아 무게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수소를 이용해 불을 뿜을 수 있었던 거고요. 문화적으로 연결된 적 없었던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용이라는 동물을 상상했고 그들의 모습이 조금씩 달랐던 것도 그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꽤 그럴싸하죠? 하지만 그냥 그럴싸할 뿐입니다. 이 영화의 과학은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엄밀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내장의 박테리아가 만들어낸 수소로 부레를 부풀려 무게를 줄인다는 가설을 보죠. 영화 속에서 태너는 그 가능성을 알아내고 흥분하며 외칩니다. "이 정도의 수소가 얼마만큼의 무게를 들 수 있죠?" 교활하게도 영화는 여기서 답을 듣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갑니다. 당연하죠. 답이 나온다면 그 정도 크기의 동물이 아무리 부레를 부풀려도 그 정도로는 인간 아이 한 명의 무게를 감당하기도 어려울 정도라는 사실이 폭로될 테니까요. 고로 여기서부터 이들의 이야기는 완전한 SF식 허구가 되는 것입니다. 은근슬쩍 과학적 디테일을 무시한 일반 SF요.

[환상의 동물, 용]은 장르물의 도구를 빌린 일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철저한 장르물입니다. 용이라는 주제부터가 그렇습니다. 이 동물은 과학적으로 도출된 존재가 아니라 장르팬들이 원래부터 좋아하며 계속 보고 싶어하는 대상이지요. 타임머신이나 초광속우주선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영화가 다루는 이 과학도 장르적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피터 호가스라는 과학자가 고문으로 참고했는데, 그도 용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비슷비슷한 여러 시도가 장르 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참으로 뻔뻔스러운 거짓말이고 [디스커버리]와 같은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방영될 자격도 없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환상의 동물, 용]은 SF로 보면 꽤 재미있습니다. 태너 박사의 모험은 지적/물리적 서스펜스가 넘칩니다. 용의 시체는 흥미로운 연구자료이며 추론 과정도 재미있습니다. 전지적 관점에서 등장하는 용들도 [Walking With...] 시리즈의 고대동물들처럼 흥미로운 드라마의 주인공들입니다. 특히 한 마리씩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마지막 용 모녀의 이야기는 애처롭고 감동적이기까지 해요. 보면 눈물이 핑 돕니다.

그래도 용에 대한 진짜 진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용이라는 존재를 상상했던 걸까요? 그 기원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번 탐구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06/08/09)

DJUNA

기타등등

미국판에서는 시간 관계 때문에 몇몇 장면들이 삭제되었고 패트릭 스튜어트가 나레이터를 맡았다더군요. 디스커버리에서 방영한 버전은 오리지널 영국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