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임권택

주연
장동휘
김희라
박노식
유미

혼도

[황야의 독수리]는 소위 만주 웨스턴이라고 불리우는 장르에 속해 있습니다. 6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의 성공 이후 전세계적으로 쏟아져 나온 가짜 웨스턴들 중 하나죠.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만주하면 대충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일대일 결투가 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무법천지이고, 인디언 대신 마적들이 있고, 그림을 깔아줄만한 대평원도 있습니다. 물론 정말 만주까지 가서 영화를 찍을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개념은 그렇다는 거죠.

영화는 장동휘가 연기한 싸나이 주인공의 복수담입니다. 이 주인공은 박노식이 연기한 사디스틱한 장교가 이끄는 일본군에게 가족을 잃었어요. 그 뒤 20년 동안(!) 그는 만주 벌판을 누비면서 원수들을 한 사람씩 총으로 쏴 죽입니다. 하지만 여기 문제가 하나 있어요. 그 장교는 가족을 몽땅 죽이는 대신 아들을 데려와 충성스러운 일본군 장교로 키웠던 거죠. 복수자 장동휘가 자기를 추적하고 있다는 걸 안 박노식은 그 사이에 김희라가 연기하는 아들을 방패로 끼워넣습니다. 하지만 이 방패엔 약간 문제가 있었으니, 이 아들이라는 친구는 자기가 좋아하는 중국인 가수를 아버지의 부하들이 집단으로 겁탈한 뒤부터 슬슬 충성심을 잃기 시작했거든요.

[황야의 독수리]에서 존 포드 영화의 정갈한 오락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60년대 이후 서부극 아류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이 영화도 필요 이상으로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냉소적입니다. 일본군 점령하의 만주라는 배경에도 역사적 의미는 없어요. 법에 의해 제재 받지 않는 터프한 주인공들이 온갖 끔찍한 일들을 저지를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한 핑계죠. 중간에 독립군들이 등장해서 납치된 민족투사를 구해야 한다고 소란을 떨지만 그 역시 영화 후반에는 의미를 잃습니다. 사실 관객들은 독립군이 다 죽어도 신경 안 써요. 주인공이 복수를 이룰 것인지 궁금해할 뿐이죠.

이 영화의 주인공들한테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식 쿨한 매력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원래부터 제가 옛날 한국 영화에 나오는 터프한 남자배우들한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긴 하지만, 단순한 개인적 취향만으로 이 영화 주인공들의 혐오스러움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박노식이 연기한 일본군 장교는 작정하고 불쾌하게 구는 인물이지만 (자기 부하들이 사람을 죽이거나 겁탈하는 동안 "아, 시상이 떠오른다!"라고 외치면서 엉터리 시를 읊는 사람이랍니다) 장동휘나 김희라도 불쾌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정당한 복수자보다는 연쇄살인마에 더 가깝습니다. 특히 가수를 겁탈한 부하들을 한 명씩 몰래 살해한 뒤 시체를 숨기는 아들은요.

그래도 이 피투성이 난장판에 어떤 영향력과 매력이 숨겨져 있는 건 사실입니다. 일종의 자포자기식 매력이라는 거겠죠. 더 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고 삶을 존중할 의도도 없는 불쾌한 남자들의 자폭을 구경하는 기분입니다. 1960년대 말 일반적인 한국 남성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탐구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지요. (06/01/24)

DJUNA

기타등등

사진을 찾아주신 nixon님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