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셰카르 카푸르 Shekhar Kapur

주연
케이트 블란쳇....엘리자베스 1세
Cate Blanchett....Elizabeth I
제프리 러쉬....프랜시스 월싱엄 경
Geoffrey Rush....Sir Francis Walsingham
조셉 파인즈....로버트 더들리
Joseph Fiennes....Robert Dudley
리처드 어텐보로....윌리엄 세실 경
Richard Attenborough....Sir William Cecil
크리스토퍼 애클리스턴....노포크 공작
Christopher Eccleston....Duke of Norfolk
캐티 버크....메리 여왕
Kathy Burke....Queen Mary Tudor
파니 아르당....마리 드 기즈
Fanny Ardant....Mary of Guise
뱅상 카셀....앙주 공작
Vincent Cassel....Duc d'Anjou
존 길거드....교황
John Gielgud....The Pope

듀나 혼란스럽군요. 머리가 어찔어찔해요. 역사책을 믹서에 넣고 갈아 만든 주스를 마신 기분입니다.

파프리카 이해하겠네요. 저 역시 머리가 좀 아프거든요. 차라리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봤으면 더 나았을텐데.

듀나 IMDb의 어떤 유저가 말하더군요. [엘리자베스]의 영국은 진짜 영국이 아니라 영국 비슷한 평행우주라고요. 정말 그래요. 영화는 너무나도 태평스럽게 역사적 사실들을 멋대로 뜯어고치고 이어 붙이는데, 그 태평스러운 대담성엔 혀가 굴러갈 지경입니다.

가장 사람 골치 아프게 만드는 것은 시간의 왜곡입니다. 영화는 엘리자베스의 런던탑 유배에서 시작해서 노포크 공작의 처형으로 끝이 납니다. 대충 15년 정도 쯤 되는 시간이죠. 하지만 영화는 이 모든 사건들이 1, 2년 안에 일어난 것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머리가 어찔어찔한 거죠. 예를 들어 노포크의 처형과 마리 드 기즈의 죽음 사이엔 10년의 차이가 있지만 영화는 이 두 죽음을 한 덩어리로 묶어 버립니다. 갑작스럽게 줄어든 시간차 때문에 월싱엄이 마리 드 기즈를 침대에서 암살했다는 에피소드의 허구성은 오히려 잊혀질 지경이에요.

파프리카 캐릭터의 개조 역시 불만스러울 듯 한데요? 윌리엄 세실의 비중은 이상할 정도로 축소되었죠. 집권 초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세실이 영화에서는 귀찮은 시아버지 쯤으로 묘사되었으니까요.

노포크 공작을 단순한 반역자로 밀어붙인 것도 문제가 많다고 할 수 있죠. 사실 노포크는 그렇게 일관성 있는 반역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집권 초기엔 엘리자베스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죠. 그를 몰락으로 몰고 간 건 카톨릭 신앙이 아니라 더들리에 대한 질투심이었습니다.

로버트 더들리도 지나치게 단순하게 처리한 구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에이미 로스바트의 죽음 말이에요.

그러나 이 모든 고증을 다 살렸다면 이야기는 상당히 늘어졌을 겁니다. 평행우주건 무엇이건, 이 영화는 하나의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순진한 젊은 여자가 노련한 절대 군주로 탈바꿈하는 과정 말이에요. 만약 역사적 고증이 그 이야기에 방해가 된다면 개조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듀나 저 역시 고증에 너무 뻣뻣하게 얽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약간의 개조 정도는 인정해요. 아까 에이미 로스바트 이야기가 나왔는데, 로버트 더들리가 로맨틱한 연인으로 묘사되어야 이 영화의 스토리에 제대로 봉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여왕과 결혼하려고 아내를 죽였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정도는 생략될 수 있습니다. 영화가 남자들의 세계에서 독립적인 군주로 성공하려는 여성 이야기를 다룰 생각이었다면 세실을 간섭꾼으로 만든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중있는 내부의 적이 한 명 필요하다면 노포크를 부풀릴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런 게 한둘이어야죠. 이 영화의 역사 창작은 정도가 지나칩니다. 적어도 전기 영화라면 최소한 수준의 고증은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끝도 없이 "어 저건 저게 아닌데..."를 되씹는다면 문제가 있는 거죠.

게다가 과연 이 영화가 그렇게 역사를 뒤바꾸어서 얻은 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전 이 영화의 각본에 불만이 꽤 많거든요. 대책없이 벌려 놓기만 해서 후반부로 가면 영화가 너무 산만해져요.

전 역사적인 사실을 개조하지 않고도 이 정도의 박진감은 얻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아니,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죠. 정 역사를 개조할 생각이었다면 보다 더 짜임새있게 할 수도 있었지요.

파프리카 흠, 전 그 정도로 엄격하지 않을 수 있어요. 저 역시 머리가 어찔어찔하기는 하지만 제 관대함의 수준은 훨씬 높습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를 허공에서 튕겨나온 가공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비워놓으면 엘리자베스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입지 강화를 위한 엘리자베스의 투쟁은 현대 커리어 우먼의 고민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를 엘리자베스 왕조 식 [대부]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순수함을 잃고 군주가 되어가는 정치가의 이야기로요. 이것도 저것도 싫다면 잃어버린 사랑과 배신에 대한 이야기(웃지 말아요!)도 됩니다. 영화는 이 모든 것들을 일관성 있게 엘리자베스라는 캐릭터에 밀어 넣는 데에 나름대로 성공하고 있습니다.

듀나 엘리자베스의 캐릭터가 잘 되어 있다는 데엔 동의합니다. 그러나 주변 인물들은 그만큼 입체성이 살아 있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어느 정도 비중있게 다루어진 인물은 로버트 더들리인데, 조셉 파인즈가 밋밋하게 연기해서 그런지 뚜렷한 개성은 없어 보입니다.

파프리카 영화 속에서 더들리는 '제인 맨스필드 영화에 나오는 예쁜 남자들' 정도의 비중이죠. 전 오히려 그 무개성이 캐릭터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실제 로버트 더들리도 꼭 그랬을 것 같지 않아요?

듀나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아마 엘리자베스만이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가 필요한 유일한 캐릭터일지도 모릅니다. 다행히도 케이트 블란쳇이 아주 잘하고 있죠.

파프리카 야후!!! 바다붐!!!!

듀나 네, 블란쳇은 좋은 배우입니다. 매력적이고 태도에는 위엄이 넘치며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엘리자베스 여왕 역에 아주 잘 맞는 외모를 하고 있죠. 블란쳇의 카리스마는 영화 전체를 끌어갈 만큼 강렬하고 수줍은 풋내기에서 노련한 마키아벨리식 정치가로 변화해가는 과정 역시 뛰어나게 연기 되었습니다. 블란쳇은 이 영화의 가장 좋은 부분입니다. 전 블란쳇만 보기 위해 이 영화를 수없이 더 볼 수 있어요.

다른 배우들도 잘하는 편이죠. 리처드 어텐보로가 윌리엄 세실 역을 하기엔 지나치게 나이가 많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시간 여행을 하는 영화니 봐 줄 수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애클리스턴이나 제프리 러쉬도 믿음직합니다. 그네들이 평면적으로 보인다면 그건 각본 탓이지 배우 탓은 아닙니다. 파니 아르당이나 뱅상 카셀과 같은 프랑스 배우들이 영어권 배우들과 매끄럽게 어울리는 것도 플러스가 됩니다.

비주얼도 인상적이지만 잘 다듬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좋은 부분들은 프로덕션 디자인이나 의상 디자인처럼 개별적인 것들입니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아주 거친 느낌을 줍니다. 스토리는 덜컹거리고 편집은 종종 튑니다. 이렇게 된 전체적인 책임은 감독인 세카르 카푸르가 져야 하겠지요. 고도로 양식화된 이런 종류의 역사극은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너무 가볍게 보았어요.

파프리카 하지만 그가 풋내기라는 게 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듀나 전 더 자코비안 적인 영화를 기대했습니다.

파프리카 요약할 시간이네요. 저 역시 이 영화의 각본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하고 역사적 고증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보지만 그래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거칠지만 힘있는 영화이며 제시되는 이슈는 현대 관객한테도 여전히 먹힙니다.

듀나 글쎄요. 전 이 주제로 훨씬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질만 따진다면 전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빛나는 생애와 블란쳇이라는 좋은 배우를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훨씬 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거슬리는 것은 그 도달하지 못한 가능성입니다. (99/03/20)

D&P

기타등등

불완전한 자막 번역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하나 있더군요. 파니 아르당이 연기한 캐릭터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아닙니다. 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이고 제임스 5세의 아내였던 마리 드 기즈죠.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의 동생 뻘 되는 나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