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레아 풀 Léa Pool

주연
카린 바나스....안나
Karine Vanasse....Hanna
파스칼 뷔시에르....안나의 어머니
Pascale Bussières....Mère de Hanna
미키 마노일로빅....안나의 아버지
Miki Manojlovic....Père de Hanna
알렉상드르 메리노....폴
Alexandre Mérineau....Paul
모니크 메르퀴르....안나의 할머니
Monique Mercure....Grand-Mère de Hanna
샬로트 크리스텔러....로라
Charlotte Christeler....Laura
낸시 휴스턴....선생님
Nancy Huston....Professeur

1.

1963년 어느 날, 우리의 주인공 안나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비브르 사 비]가 상영되는 극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영화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안나의 눈은 영화의 주인공 나나를 연기하는 안나 카리나의 얼굴에 멎습니다. 우리는 화면 속의 안나 카리나가 '나는 내 삶에 책임이 있어'라고 말할 때, 안나의 입술도 그녀를 따라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결정적인 순간 안나 카리나가 카메라를 향해 눈을 돌릴 때, 이 13살 짜리 퀘벡 소녀에게 [비브르 사 비]는 그녀만의 영화가 됩니다.

정확히 1963년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시기에 이와 아주 유사한 일이 스위스에서 일어났던 게 분명합니다. 레아 풀의 영화 [셋 미 프리]는 분명 자서전적인 이야기니까요. 많은 영화인들에겐 그들을 영화라는 구렁텅이에 밀어넣은 첫사랑의 영화가 있습니다. 풀에게 그 영화는 [비브르 사 비]였던 거죠.

2.

예술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에겐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도피자들입니다. 삶이 그들에게 충분치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대신할 만한 허상을 좇습니다.

안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나의 가족은 결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폴란드계 유태인인 아버지는 생활 능력이 없는 자칭 시인으로 평일 낮 대부분을 체스로 보내고 밤에는 자기를 뺀 세상 모두를 탓하는 사람입니다. 낮에는 직장일로, 밤에는 아버지 시를 타이프치느라 바빠 늘 기진맥진한 카톨릭계 퀘벡인인 어머니는 툭하면 자살을 기도하고요. 돈은 궁해서 늘 수표는 부도나고 전당포 주인은 아이들 이름을 외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안나네 가족보다 경제적으로 빈궁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죠. 정말로 안나를 정신없게 만드는 것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입니다.

프로이트를 영화에 끼워 맞추려는 사람들은 꽤 재미있어 할 거예요. 예를 들어 안나와 부모의 관계는 반외디푸스 콤플렉스적 관계라고 부를 만 합니다. 안나가 어머니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고 그만큼이나 어머니를 자기로부터 빼앗아가고 괴롭히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하거든요. 안나와 오빠인 폴과의 관계도 그냥 남매 사이의 애정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관능적인 기반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비브르 사 비]와 안나 카리나가 안나의 인생에 비집고 들어오자 안나의 이야기는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가망 없는 어머니 대신 안나 카리나가 연기한 캐릭터 나나가 새로운 롤 모델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녀는 나나의 대사를 암기하고, 학교 숙제로 [비브르 사 비]에 대한 글을 쓰고, 나나처럼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결국에는 안나 카리나와 어딘지 모르게 닮은 학교 선생님을 따르게 됩니다. 이 학교 선생님에 대한 안나의 감정은 흠모와 애정이 대책없이 뒤섞여 있는데, 사실 안나가 주변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모두 감정은 이처럼 아직 분명하게 모양잡혀 있지 않습니다. 안나는 어른과 아이의 위태로운 경계에 서서 자신의 경계선을 용감하게 넓혀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안나와 여자 친구 로라와의 관계도 그런 모호함 속에 놓여 있습니다. 둘은 댄스 파티에서 만나 (둘이 서로의 팔을 잡아 끌면서 친근함을 쌓아가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섬세하게 표현된 부분입니다) 결국 키스까지 하는 사이로 발전합니다. 안나는 당연하다는 듯 로라를 오빠 폴과 공유하는데, 이들의 삼각 관계는 질투와 같은 불편한 부산물없이 너무나도 편하게 그려져서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입니다.

[셋 미 프리]는 분명한 플롯이나 줄거리가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안나는 영화가 끝날 무렵에도 여전히 덜컹거리며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러나 레아 풀은 영화에 성장 영화의 형식적인 결말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안나는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또다른 탈출을 합니다. 영화는 선생님이 빌려준 카메라로 안나가 찍어대는 (과연 안에 필름이 있기는 한 건지) 어머니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안나는 [비브르 사 비]의 종종 치명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녀 자신의 영화를 찍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안나는 예술가로서 그녀 자신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이죠. 천당에서 나나가 보았다면 얼마나 기특해 했을까요.

3.

[셋 미 프리]의 가장 큰 성과는 안나를 연기한 카린 바나스라는 재능있는 젊은 배우의 발굴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어린 시절의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연상시키는 이 어린 퀘벡 배우는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자연스러워서 가끔 파격적으로 흘러가는 영화의 스토리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장래가 기대되는 아주 좋은 배우입니다.

게이 관객들이라면 [밤이 기울면]의 파스칼 뷔시에르가 안나의 어머니로 나온다는 것에 반가워하겠지요. 제 생각엔 뷔시에르의 연기는 이 영화 쪽이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퀘벡 배우들이 바이링규얼이라고 해도 역시 모국어 영화가 배우의 진가를 보기에 더 적절하지 않나 싶어요. (01/01/30)

DJUNA

기타등등

IMDb의 모 사용자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치명적인 고증 실수가 있다더군요. 1963년 당시 퀘벡에서는 [비브르 사 비]를 상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들어온 뒤에도 안나와 같은 나이 또래 애들은 등급 때문에 그 영화를 볼 수 없었다고 하고요. 스위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레아 풀의 자서전적인 이야기가 같은 시기의 퀘벡에 이입되자 발생한 실수였죠. 차라리 스위스에서 찍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