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마이클 앱티드 Michael Apted

주연
더그레이 스코트....톰 제리코
Dougray Scott....Tom Jericho
케이트 윈슬렛....헤스터 월리스
Kate Winslet....Hester Wallace
제레미 노덤....위그램
Jeremy Northam....Wigram
사프론 버로우즈....클레어 로밀리
Saffron Burrows....Claire Romilly
니콜라이 코스터-발다우...토마스 푸코프스키
Nikolaj Coster-Waldau....Tomas Pukowski
톰 홀랜더....로지
Tom Hollander....Logie
코린 레드그레이브....트루브리지 제독
Corin Redgrave....Admiral Trowbridge
매튜 맥페이든....케이브
Matthew MacFadyen....Cave
로버트 퍼프....스키너
Robert Pugh....Skynner
도널드 섬터....레버레트
Donald Sumpter....Leveret
리처드 리프....백스터
Richard Leaf....Baxter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리코와 월리스

저널리스트 출신의 영국 작가 로버트 해리스는 늘 2차 세계대전에 매료되어 왔습니다. [대천사]는 가짜 히틀러의 일기를 둘러싼 해프닝에 대한 이야기였고, [파더랜드]는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60년대를 다룬 대체 역사 소설이었지요.

위에 언급한 두 작품이 모두 가짜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눈치채셨는지요? 위의 두 작품처럼 노골적인 의도를 내세운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에니그마]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영화(소설은 안 읽었으니 원작도 비슷할 거라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는 블리츨리 파크의 암호 해독팀에 대한 이야기를 성실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정작 앨런 튜링과 같은 중요 인물은 언급도 되지 않으니까요. 전에 다룬 [YMCA 야구단]이나 [K-19] 정도의 충실도를 생각하시면 될 듯 해요. 가공 인물들이 실존 인물들을 모두 몰아낸 블리츨리 파크인 거죠.

이 영화에서 튜링을 대체한 인물은 톰 제리코라는 케임브리지 출신의 수학자입니다. 제리코는 에니그마 전쟁 초기에 엄청난 성과를 거둔 인물이지만, 블리츨리 파크의 직원인 클레어에게 실연당한 뒤 완전히 망가져 버립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제리코는 다시 암호 전쟁에 불려나오지만 그와 동시에 클레어는 이상한 상황 속에서 실종되고 말아요. 제리코는 클레어의 룸메이트인 헤스터와 함께 실종 사건의 비밀을 캐기 시작합니다.

[에니그마]는 굉장히 영국적인 스릴러입니다. 그것도 2차 세계 대전 전후에 나왔을 법한 구식 스릴러죠. 해먼드 이네스나 니콜라스 블레이크 같은 사람들이 썼던 신중하고 여유있는 소설들을 생각해보세요. 예절바르고 거의 비폭력적이기까지 하지만 여전히 꽤 위험한 설정 속에서 정중한 중상류층의 영국인들이 조용하고 치명적인 게임을 벌이는 것이죠. 어떻게보면 당연합니다. 리처드 해리스의 소설 뿌리가 거기에 닿아있을테니까요.

실제 역사와 픽션을 뒤섞는 해리스 고유의 방식도 주목할만합니다. 제리코는 여자 주인공 클레어를 쫓는 동안 에니그마를 둘러싼 실제 전쟁에도 관여합니다. 제리코와 헤스터는 클레어 실종 사건을 캐내는 동안 거의 반세기 동안 비밀로 붙여졌던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 하나와 미리 마주치기도 해요. 지나치게 꼬임이 많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 둘의 결합은 효율적입니다.

[에니그마]는 러브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제리코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정체불명의 팜므 파탈인 클레어에서 수수한 헤스터로 서서히 자리를 옮겨갑니다. 대충 이치가 맞는 이야기죠. 원래 사람들은 자기 리그 밖의 존재에 끌리다가 손에 닿는 보다 현실적 사람들과 맺어지곤 하잖아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서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배우는 아주 완벽하게 이용되고 있습니다. 임신 중이라 한참 체중이 불어있던 당시의 윈슬렛은 영화가 요구하는 수수하고 평범한 이미지에 완벽하게 맞으면서도 이 영화의 가장 호사스러운 스타이기도 하거든요.

마이클 앱티드는 별다른 트릭없이 직설적으로 영화를 풀어갑니다. 별다른 설명없이 회상과 현실을 뒤섞는 초반은 거의 불친절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전체적으로 뿌연 비주얼은 스릴러보다 BBC 미니 시리즈를 연상시키며 스릴러의 자극보다는 역사물의 향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앱티드는 이 영화의 관객들을 비교적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배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개인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에니그마]는 도전적은 아니더라도 모범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국식 스릴러입니다. 능력을 인정받은 감독이 역시 재능을 인정받은 여러 배우들을 끌어모아 만든 양질의 상품이죠. 하지만 많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지나치게 느리고 말만 많으며 필요 이상으로 플롯이 배배꼬인 갑갑한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결코 모순되는 평가들이 아니지요. (02/10/01)

DJUNA

기타등등

에필로그에 나오는 윈슬렛의 임신한 모습은 당연히 분장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