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박형진

연출
홍석구

주연
김태호....이랑
장희진....수진
차서원....미림
서갑숙....숙희
이정호....금부도사
진봉진....김상헌 대감
이용녀....무당
김효서....신부
홍예인....이천댁
김경룡....행랑아범
조수민....보리

수진

때는 기묘사화 직전. 요새랑 특별히 다를 것도 없던 때입니다. 주인공인 이랑은 조광조의 제자인 이상주의자로, 대충 기죽은 운동권 학생 분위기가 나는 남자입니다. 가세는 기울었지요. 모셨던 스승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지요. 학생 때 같이 놀았던 애들은 입장을 싹 바꿔 출세해서 잘 살고 있지요. 결혼을 약속했던 약혼녀는 그만 사화에 희생되어 기생으로 팔려갔지요. 이랑이 그나마 생산적으로 하는 일은 집의 계집종 수진과 놀면서 어설프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밖에 없군요. 그런데 이것도 제대로 풀리지 않으니, 결코 수진은 가볍게 가지고 놀 사람이 아니었어요. 당시 조선 사람들은 스토커를 어떤 단어로 표현했는지 모르겠군요. 우리나라에서 이 단어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쓰이지 않았습니다.

척 봐도 이랑은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현대 시청자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어요. 결코 그렇게 온 몸을 바쳐 공감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캐릭터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럴싸하게 전개할 수 있는 에너지와 감정, 현재와의 연결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실 현재와의 연결성은 좀 과한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와 요새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다른 부류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고 우리가 게으르게 생각하는 조선시대의 고정관념도 가끔 깨주는 게 좋습니다.

아, 그런데 이 드라마는 욕심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랑의 이야기 중 쓸 만한 걸 하나 선택해서 거기에 집중했다면 결과는 나았을 겁니다. 러닝타임이 지금의 두 배만 되었어도 정리할 시간 여유를 얻을 수 있었을 거고요. 하지만 드라마는 이 제한된 시간 동안 이랑이라는 캐릭터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해버립니다. 그는 좌절한 운동권이고, 사화로 여자친구를 잃은 연인이고, 4년 전에 수상쩍은 상황 속에서 실종된 스토커 계집종의 귀신에게 쫓기는 희생자입니다. 그것도 연대기 순으로 순서대로 푸는 대신 시간선을 배배꼬면서 복잡하게 합니다. 그래서 스토리 따라가기가 어렵냐고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대책 없는 산만함은 느껴지지요. 한 마디로 씹을 수 있는 것 이상을 입에 물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가장 손해를 보는 건 이랑입니다. 만약 그가 셋 중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전 그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존중하고 이해할 수는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서투른 저글러처럼 셋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해요. 사방에 던진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주인공이 죽기를 바라면서 드라마를 봤을 거예요. 그를 악당으로 증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보는 게 귀찮았기 때문이죠.

여기서 귀신으로 나오는 수진은 어떠냐? 역시 우리가 이해할 수는 있어도 굳이 공감할 필요는 없는 인물입니다. 당시엔 거의 불가능한 환상을 품고 있는 집착증이 심한 아가씨지요. 전 이런 인물이 있을 수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수진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끝까지 결정내리지 못합니다. 일단 그냥 객관적으로 ‘이런 사람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지금처럼 멜로가 결합된 호러 장르에서 그런 태도는 나태하게 보입니다.

호러 장면들은 나쁩니다. 대부분 수진의 귀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빙의해서 이랑을 괴롭히는 이야기의 끝없는 반복인데, 아이디어가 빈약하고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는데다가 모두 너무 길어요. 종종 삽입되는 과거 회상이나 미림과의 멜로, 정치물들이 공포의 흐름을 깨먹고요. (09/08/19)

DJUNA

기타등등

기생이 된 미림과 이랑이 가야금 연주를 넘어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바람의 화원]의 한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