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고은님
인은아
박명숙

연출
강대선
김상호

주연
임주은....윤하나
이서진....신류
건일....정시우
지연....윤두나
이진....이혜원
김갑수....백도식
김성령....하나/두나의 엄마
유연석....백중찬
최수은....부회장
안서현....어린 하나

하나

지금 저에겐 제대로 된 [혼]에 대한 리뷰를 쓰는 데 필요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암만 봐도 어제 완결된 이 드라마는 정상이 아닙니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어서 원래 계획에서 일탈해 자폭한 것이 분명해요. 7회 들어서 갑자기 메인 작가가 바뀐 것도 걸리고요. 이미 공식 페이지의 게시판에는 온갖 종류의 음모론과 '원래 결말'임을 주장하는 대안 결말들이 돌고 있습니다. 인터넷 어딜 가도 10회의 결말을 인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상황에서 작가와 감독의 '의도'를 분석하는 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혼]을 중간에 자폭하고 만 미완성작이라고 보는 것도 정답은 아닙니다. 전 분명히 10회의 결말이 자폭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폭의 결과 만들어진 결말이 지금까지 [혼]이라는 드라마가 지향해왔던 방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기도 어렵단 말입니다. 그것이 1부의 프롤로그를 설명한다는 기초적인 일도 못하는 괴상한 파편들에 불과해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요? [혼]이 첫 회부터 끝날 때까지 시청자들의 어떤 감정을 자극해왔는지 생각해보시죠. 사람에 따라 공포나 연민과 같은 것들을 댈 수도 있겠지만 진짜 답은 단 하나입니다. 짜증이죠. 첫 회부터 [혼]은 일종의 짜증 기계였습니다. 이 드라마의 악당들은 오로지 시청자들에게 무기력함과 짜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사실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건 악당들뿐만이 아니었죠. 남자 주인공 신류도 만만치 않았으니.

저에게 이런 각본은 아주 신기하게 보입니다. 물론 짜증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원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짜증나는 곳이니까요. 짜증은 주인공에게 행동 동기를 주고 클라이막스에서 카타르시스를 폭발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로지 짜증만을 유발하는 각본은 이런 장르물의 일차적인 존재의미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이런 각본들을 따라가는 영화나 드라마들을 꽤 많이 봤습니다. 특히 한국 호러 영화엔 그런 예들이 많지요. 지금까지 나온 모든 안병기 영화들을 보세요. 안병기는 관객들의 신경을 긁고 짜증나게 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짜증으로 만들어낸 설정에서 카타르시스를 터트리는 능력은 괴상할 정도로 빈약하지요.

이런 불일치가 드라마나 장르에서 거의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저는 슬슬 이것이 드라마나 영화 각본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정신질환의 결과가 아닌가 의심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짜증의 극을 달리는 드라마들이 시청률 1위를 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이것을 단순한 작가들의 병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겠습니다. 이 짜증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슬슬 매저키스트로 변하고 있다는 게 더 적절한 설명일지도 몰라요.

[혼]도 그런 경우일까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이 드라마는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아내의 유혹]을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려다가 잘못된 길로 빠져 막판에 실패한 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혼]은 다릅니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시청자들에게 의미있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하나가 저지르는 복수극을 보시죠. 처음엔 이 장면들에서 제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었던 건 만든 사람들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6,7,8회로 가면 이게 그들의 의도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능력 부족이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의도는 드라마가 사이코패스와 악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방식에 숨어 있습니다. 드라마는 전통적인 복수의 과정을 통해 사이코패스 악당들을 처단해도 우리가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종류로 만들어진 괴물이라 뉘우침 따위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것은 그냥 사실 기술입니다.

드라마가 악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들이 모토로 삼은 건 니체의 유명한 경구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 것이다"이니, 단순히 선과 악, 복수자와 악당을 흑백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도를 배반하는 것이 되겠죠.

하지만 여기엔 보다 치명적인 유혹도 숨어 있습니다. 장르 작가들이 종종 빠지는 함정이죠. 그것은 시청자/관객/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일부러 제공해주지 않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엔 [혼]을 지금의 함정에 빠트린 결정적인 요인도 이것인 것 같습니다.

얼핏 보면 이건 이치에 맞습니다. 세상은 정말 [몬테 크리스토 백작]처럼 풀리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장르물에서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세상을 사는 시청자들에게는 더욱 그렇지요. 시청자들은 세상이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 다르다는 걸 이미 압니다. 9시 뉴스만 틀어도 백도식 같은 인간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실실 쪼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누군가가 그런 걸 알려주겠다고 우쭐거린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바보처럼 보이죠. 우리가 장르물, 아니, 모든 예술품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 상황의 극복입니다. 그것이 꼭 해피엔딩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극복의 시도만큼은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것은 자기도취에 빠진 십대 소년의 자학보다 못합니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남자주인공 신류가 그렇게 매력이 없는 건 그의 정신연령이 딱 초딩 수준에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혼]의 이런 시도가 못나보이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들이 비판을 위해 드라마에 도입한 세계 묘사가 영 꽝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대전제,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부패해 있고 불공정하며 종종 사악하기까지 하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부묘사에 들어가면 사정이 다릅니다. [혼]에서 그리는 사건 상당수는 우리나라에서 그냥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니, 몇몇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없어요. 무언가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는데, 정작 그 비판의 대상은 작가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건 작가들이 대상에 대한 아주 피상적인 정보만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출처는 약간의 교양서와 번역된 장르 소설, 만화책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특히 일본 작품들요. 예를 들어 [혼]이 다루는 '강력범에게 관대한 시스템에 대한 분노'는 일본 장르물의 단골 테마죠. 하지만 일본과 우리나라는 같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더 낫다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식으로 기형인 거죠. 세부 정보는 더 끔찍합니다. 이진이 연기하는 정신과의사 이혜원이 '정신분열증', '해리성 인격 장애', '다중인격'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쓰는지 한 번 보시죠. 이런 사람이 정신과의사가 되어 돌아다닌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 높은 자리에 있는 모든 악당들은 사이코패스다!'식 선언도 문제가 있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식으로 타자화하면 마음이 편하겠죠.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손쉽지는 않습니다. 한나 아렌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굵직한 악은 대부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들에 의해 저질러집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모두 사이코패스라고 불러서 마음이 편해졌다면 그건 그들이 정말 사이코패스여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그들에게 욕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이들이 지표로 삼고 있는 니체의 경구를 위반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혼]에는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사실적인 사건들도 있습니다. 다른 나라 장르 소설들에서 가져온 허구만으로 시청자들을 짜증내게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이미 전혀 믿을 수 없는 정보들이 반 이상 섞여 있으니 상식적인 시청자들이라면 이야기 전체에 의문을 제기하기 마련입니다. 그럼 비판 기능 자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와 액션의 엉성한 세부묘사 때문에 사정은 더 나빠집니다. 예를 들어 백도식이 겨우 징역 2년을 마치고 세상에 나올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높은 양반들이 커버를 해주려 한다고 해도 주변에 시체들과 노출된 정보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들 막으려 한다고 해도 신류만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습니까? 경찰들과 공무원들이 귀중한 단서가 될 지도 모르는 증거물을 엉성하게 다루는 꼴은 어떻고요? 장르물은 종종 효과를 위해 환상적인 설정을 용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이런 엉성함은 드라마가 다루는 초현실적인 재료의 설득력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과연 우리의 주인공 하나의 초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입니까? 투명인간도 되고 벽도 뚫는 수준인가요? 어떤 장면은 그런 능력 없이는 설명이 안 됩니다.

연출은 한참 모자랍니다. 자기가 무엇을 할 줄 아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무조건 장르에 달라붙어서 닥치는 대로 뭔가를 하는데, 실패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초기에 사람들은 드라마의 어색한 호러 연출에 진저리를 쳤습니다. 전 말도 안 되는 액션 묘사를 지적하려 합니다. 김광규가 연기한 악당을 처단하려던 하나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7회의 장면을 보죠. 난간에 걸터 앉아 본격적인 발작을 일으키면서부터 악당의 칼에 찔릴 때까지 자그마치 20여초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때는 70년대 싸구려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다찌마와리 장면을 찍는 게 버릇인 신류 선생은 바로 밑에 있으면서도 그런 하나를 보고 있기만 합니다. 타이밍이고 편집이고 그냥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각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6회에 나오는 하나의 위기일발 장면은 더 기가 막힙니다. 전혀 시간 계산이 되어 있지 않아요. 설마 "제발 경찰에 신고해, 이 바보들아!"라고 외쳤던 시청자가 저뿐이었을까요.

바로 이런 서툰 연출 때문에 [혼]이 괴상한 퀄리티를 부여받기도 한다는 점은 언급해야겠습니다. [혼]에는 정확한 정보와 액션과 액션을 연결하는 올바른 논리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좌뇌 없이 우뇌만으로 만들어진 작품처럼 보입니다. 굉장히 기형적인 악몽이죠. 전 잠시 이게 '모든 게 꿈이야!'라는 효과를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게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아니더군요. 그냥 만드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전 그 사람들이 드라마를 만드는 동안 단체로 수상쩍은 화학물질을 흡입하고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혼]은 정말 아쉬운 실패작입니다. 이들에게는 시의 적절한 사회 비판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야기에 필요한 특수효과 기술도 충분했고요.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썩 좋은 배우들이 있었습니다. 전 이서진의 캐릭터 신류가 지겹기 짝이 없었지만 각본의 한계를 생각해보면 배우를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진은 평범했지만 백도식을 연기한 김갑수는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효과적이었고 패키지로 투입된 세 명의 아이돌 출신 배우들도 예상 외로 잘했으며 김성령은 아름다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 역의 임주은은 올해의 발견이었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와 연출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에 아직도 볼만한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모두 임주은의 커다란 갈색 눈 덕입니다. 작가나 연출자들의 무한 삽질 때문이 아니란 말입니다. (09/09/04)

DJUNA

기타등등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충분히 실현가능했던 수십가지 대안들이 떠오릅니다. 이럴 때면 드라마의 영화화가 당연시되는 다른 나라의 시스템이 부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