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인식

주연
김혜수....지수
김태우....석원
윤찬....민석
한정수....장서
김난휘....희선
김영애....해영
박준명....윤수
조동혁....파란머리
서윤아....수연
임지훈....형기





(스포일러가 있어요. 유명한 이야기지만요.)

지수

1980년, TBC의 텔레비전 시리즈 [형사]에서는 [얼굴없는 미녀]라는 납량특집을 방영했습니다. 당시 이 에피소드는 시청자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고 그 에피소드를 볼 기회가 없어진 지금에도 그 이야기는 마치 도시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대충 이런 것이었어요. 이순재가 연기한 남자주인공은 장미희가 주연한 유부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순재는 장미희에게 매주 한 번씩 자기를 찾아오게 최면을 걸어요. 그러던 어느 날 최면에 걸려 이순재에게 오던 장미희는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문제는 장미희가 여전히 최면에 걸려있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이순재를 찾아온다는 거죠. 서서히 썩어가는 육신을 질질 끌면서요.

쇼킹했죠. 아무리 권선징악 납량특집 호러쇼라도 해도 이처럼 불순한 욕망과 변태스러운 페티시즘을 마구 노출시킨 이야기가 공중파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으니 말이죠. 더 놀라운 건 이 이야기가 썩 좋은 호러물이었다는 거죠. 좋은 공포물이 대부분 그렇듯, 섹스와 죽음이 기형적으로 연결된 이 이야기의 논리는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고 명쾌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장편 영화용은 아닙니다. 한 시간짜리 에피소드 하나가 딱 맞을 분량이죠. 김인식의 [얼굴없는 미녀]가 바로 그 [얼굴없는 미녀]의 리메이크라는 걸 알았을 때 제가 걱정하기 시작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어떻게 이 짧고 투박하고 직설적인 좀비 이야기를 세련된 장편 영화로 옮길 수 있을까요?

답은 처음부터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분명한 장르 구분부터. [얼굴없는 미녀]는 호러영화가 아닙니다. 물론 최면에 걸린 여자 주인공이 좀비가 되어 돌아온다는 아이디어는 여전히 갖추고 있어요. 그것도 없으면 [얼굴없는 미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호러 장르에 맞는 장면은 그것 하나밖에 없답니다. 영화의 나머지 부분은 몽롱한 분위기의 R등급 로맨스에 가깝습니다. 물론 변태스럽고 도덕적이지 못한 건 마찬가지죠. 남자 주인공인 정신과의사 석원은 여전히 최면에 걸린 여자 주인공 지수를 겁탈하니까요. (질문 하나. 시체에 집착하는 게 네크로필리아, 잠든 사람에게 집착하는 게 솜노필리아라면 최면에 걸린 사람에게 집착하는 건 뭐라고 부르죠?)

영화가 집중하는 건 사랑과 고독이라는 두 개의 명제 속에 갇힌 듯한 두 주인공의 고통과 갈등입니다. 석원은 자살한 아내와 아내가 숨겨놓은 연인에 대한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고 지수는... 경계선 인격 장애를 앓고 있다니 역시 살기 편하지는 않죠. 처음엔 의사와 환자로 만난 둘은 1년 뒤에 재회하게 됩니다. 둘은 친구가 되고 석원은 지수에게 최면을 걸어주는데, 그 상황을 자기 멋대로 이용하기 시작해요. 이들의 어긋난 갈등과 일탈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점점 더 부풀어만 갑니다.

영화는 성적, 정서적 불만족으로 가득 차 있고, 이 골치아픈 상태들은 노출이 심한 섹스와 그렇게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는 몇몇 행동들로 중간중간에 해소됩니다. 살갗 노출이 많은 영화들을 좋아하는 분들은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길게 묘사되는 장면은 없지만 그래도 꽤 자주 나오고 보면서 찔리지 않을 정도로 고급스럽게 치장되어 있거든요.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캐릭터에 깊이 빠지기엔 등장인물들의 자기 도취가 너무 강해요. 돈많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똑똑한 이 친구들은 자기네들이 겪는 고통을 일종의 악세서리처럼 달고 다닙니다. 자기네들은 고통스러워도 쿨하다는 걸 어떻게든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단 말이에요. 하는 짓거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감정이입을 하고 싶은 생각 자체가 사라져버려요. 김혜수와 김태우는 자기 일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감정 이입에 특별히 도움을 주지는 못해요. 종종 구식 성우식 과장까지 이어지는 김혜수의 연극적인 연기와 김태우의 카리스마가 결여된 매너리즘도 그렇게까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고요.

후반부의 호러 진행도 만족스럽지 못해요. 원작과는 달리 이 영화의 좀비 파트는 아주 짧아요. 컴퓨터 그래픽으로 묘사된 좀비 지수는 꽤 사실적이지만 분장한 장미희보다 훨씬 덜 무섭고요. 처음부터 호러 영화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니 무섭지 않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허겁지겁 끝낼 거라면 도대체 왜 처음부터 [얼굴없는 미녀]를 끌어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죠. 그냥 환자에게 최면거는 의사 이야기를 새로 쓰면 되잖아요. 어차피 앞의 이야기와 잘 어울리지도 않는데 말이에요. 이 영화의 결말은 그냥 허망하기만 해요. 깊이도 얕고요.

[얼굴없는 미녀]는 호사스럽게 잘 빠진 영화입니다. 하지만 드라마보다 인테리어 디자인이 더 눈에 잘 들어오고, 정서적 힘도 얼렁뚱땅 만든 80년대 여름 납량특집보다 약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04/07/28)

DJUNA

기타등등

1. [얼굴없는 미녀]의 원작이 아이디어를 일본의 모 소설에서 차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사실인지 모르겠군요. 그게 사실이라면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고요.

2. 사다코가 긴 생머리로 얼굴을 가렸다면 이 영화의 지수는 그 엄청난 미스코리아 헤어스타일로 얼굴을 가립니다. 모양은 바뀌었지만 귀신의 얼굴가리기 전통은 계속되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