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토드 헤인즈 Todd Haynes

주연
줄리안 무어....캐시 위태커
Julianne Moore....Cathy Whitaker
데니스 퀘이드....프랭크 위태커
Dennis Quaid....Frank Whitaker
데니스 헤이스버트....레이몬드 디건
Dennis Haysbert....Raymond Deagan
패트리샤 클락슨....엘리너 파인
Patricia Clarkson....Eleanor Fine
바이올라 데이비스....시빌
Viola Davis....Sybil
제임스 리브혼....보먼 박사
James Rebhorn....Dr. Bowman
베티 헨리츠....리콕 부인
Bette Henritze....Mrs. Leacock
마이클 개스턴....스탠 파인
Michael Gaston....Stan Fine
라리언 워드....데이빗 위태커
Ryan Ward....David Whitaker
린지 안드레타....재니스 위태커
Lindsay Andretta....Janice Whitaker
조던 퍼리어....사라 디건
Jordan Puryear....Sarah Deagan
카일 티모시 스미스....빌리 허친슨
Kyle Timothy Smith....Billy Hutchinson
실리아 웨스턴....모나 로더
Celia Weston....Mona Lauder
바바라 개릭....도린
Barbara Garrick....Doreen
올리비아 버클런드....낸시
Olivia Birkelund....Nancy

캐시와 레이몬드

토드 헤인즈가 단풍으로 물든 코네티컷의 가을 풍경으로 [파 프롬 헤븐]의 문을 열 때, 관객들은 강한 기시감을 겪습니다. 분명히 전에 비슷한 도입부를 봤기 때문이죠. 더글러스 서크의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이 바로 이런 도입부로 시작하지 않나요? 붉게 물든 가을 단풍, 선별된 중상류 사회 사람들이 사는 교외 주택가, 그 위를 흐르는 로맨틱한 음악. 이렇게 시작해놨으니 그 뒤로 이어지는 스토리의 유사성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거죠.

[파 프롬 헤븐]은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을 텍스트로 삼은 첫번째 영화가 아닙니다. 파스빈더의 걸작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도 같은 영화의 리메이크죠. 단지 파스빈더가 기본 설정만 빌려와 현대 독일에 이식했다면, 헤인즈는 [하늘이 허용하는 모든 것]을 기둥으로 삼아 자신만의 더글러스 서크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50년대 말의 서크가 영화사의 자기 검열이나 대중들의 감정을 무시하고 만들었다면 나왔을 법한 영화 말이죠. 헤인즈는 줄거리뿐만 아니라 스타일과 테크닉까지 모방합니다. [파 프롬 헤븐]은 21세기에 만들어진 50년대 영화입니다.

영화는 이번에도 사회 계급이 갈라놓은 상대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단지 강도가 높아졌어요.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 중년의 과부인 여자 주인공인 캐리가 소로 주의자인 연하의 백인 정원사인 론과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파 프롬 헤븐]에서는 동성애자인 남편 프랭크 때문에 고통받는 가정 주부 캐시가 흑인 정원사 레이몬드와 위태로운 우정을 맺습니다.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 주인공을 막는 건 나이 차이와 계급 정도지만, [파 프롬 헤븐]에서는 동성애 공포증과 인종 차별입니다. 이전 영화에서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만 무시하면 되었던 간격이 새 영화에서는 가족의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로 깊어졌어요.

[파 프롬 헤븐]에서 재미있는 건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파스빈더는 그냥 기본 설정만 끌고와 그의 세계에 이식한 뒤 정직하게 이야기를 끌어가기만 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헤인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위태로운 곡예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과연 50년대의 세계관에 갇혀 있는 캐릭터들의 대사와 행동을 어떻게 다루겠어요? 50년대의 관점으로? 2000년대의 관점으로? 직설적으로? 이중의 의미를 담아 은밀하게?

헤인즈는 일단 심각해지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냉소나 이죽거림을 줄이고 세 주인공들의 갈등을 진지하고 직설적으로 묘사합니다. 오히려 그의 접근법은 서크보다 더 심각해요. 서크는 자기가 만든 거창한 멜로드라마 영화들의 해피엔딩과 도식성을 극복하기 위해 늘 차가운 시니시즘의 흔적을 조금씩 남겨놓았으니까요.

그러나 [파 프롬 헤븐]에도 관객들에게서 시니컬한 반응을 끌어내는 몇몇 장면들이 꽤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스타일 면에서 [파 프롬 헤븐]의 위태로운 곡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인즈는 캐릭터들에게 진지하지만 관객들까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선 스타일이 튑니다. 50년대의 사고 방식에 갇힌 캐릭터들을 그냥 진지하게만 바라볼 수도 없고요. 주제도 있는 그대로 삼킬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영화가 58년에 만들어졌다면 그건 정말 용기있는 비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인종 분리가 그 때만큼 심하지 않고 동성애 역시 보다 편한 소재가 된 지금 이 비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 결과 여기서 아주 미묘한 낯설게하기 효과가 발생합니다. 전 헤인즈 역시 이 효과를 적극적으로 탐색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 이 영화에는 드랙퀸의 의상과도 같은 느낌이 강하게 풍깁니다. 여전히 진지하기 짝이 없는 영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의 유희는 남아 있는 겁니다.

영화의 시각적 인상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헤인즈는 서크처럼 거창한 원색으로 관객들을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는 밝은 파랑이나 녹색처럼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색조로 영화를 장식하는데 이런 색조 배정은 캐릭터들의 날카로운 고통을 섬세하게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엘머 번스틴의 고아한 음악 역시 이런 느낌을 적절하게 살리고 있고요. 전체적인 결과는 무척이나 게이스러워요. 당연한 것이겠지만.

배우나 캐릭터들은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보다 오히려 더 뛰어납니다. 제인 와이먼은 서크의 영화에서 좋았지만 줄리안 무어처럼 화려한 연기를 선보이지는 않았고 그 사람이 연기한 캐리도 캐시처럼 다채로운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론 역의 록 허드슨은 레이몬드 역의 데니스 헤이스버트처럼 인간적으로 보이지도, 깊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으며, 사라 역의 아그네스 무어헤드도 엘리너 역의 패트리샤 클락슨처럼 진지한 애정과 차가운 선입견을 공유하는 입체적인 캐릭터 연기를 보여준 적도 없습니다. 심지어 조금 등장하다 마는 캐시와 레이몬드의 아이들도 서크 영화의 짜증나는 대학생 남매들보다 설득력 있습니다. 데니스 퀘이드가 연기한 게이 남편 역시 이전의 그에게서 기대할 수 없었던 좋은 연기였고요.

영화의 드라마는 단순하지만 입체적으로 짜여졌고 무리한 과장을 끌어내지도 않습니다. 보다 개방적인 지금의 할리우드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조금 더 나갈 수 있었겠지만 헤인즈는 사실성을 고집합니다. [파 프롬 헤븐]은 종종 차가울 정도로 정중하고 억압된 러브 스토리입니다. 심지어 캐시와 레이몬드는 흔한 키스 한 번 하지 못합니다. 사랑한다는 고백은 더더욱 하지 못하고요. 그 소극성 때문에 인간성에 대한 그들의 소박한 믿음이 망가져 가는 과정이 더 서글퍼보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파 프롬 헤븐]은 우리에게 어떤 영화일까요? 일단 이 영화가 인종 차별이나 동성애 공포증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그런 이슈들은 존재하지만 이 영화가 다루는 1950년대말과 우리가 사는 21세기 초의 차이는 엄청나니까요. 하지만 영화는 자기들의 암묵적 규율을 위반하는 구성원들에게 사회가 가하는 형벌이라는 보편적 주제에 대한 분석으로 여전히 유효합니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날카로운 긴장과 강렬한 감정으로 가득 찬 멋진 멜로드라마이고, 화려한 시각적 성찬이며, 영화광들을 위한 흥미로운 서커스입니다. [파 프롬 헤븐]은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영화지만 제가 지금까지 나열한 장점들만 해도 그 의심은 충분히 커버될 수 있습니다. (03/04/11)

DJUNA

기타등등

1. [솔라리스]에 이어 바이올라 데이비스의 모습을 또 보게 되는군요. 소더버그가 제작 총지휘자 중 한 명이어서가 아닐까요? 데이비스는 그의 다른 영화들에도 꾸준히 출연해왔으니까요.

2. 오케스트레이션을 담당한 에밀리 E. 번스틴은 엘머 번스틴의 딸입니다. 90년대부터 쭉 아버지의 음악을 담당해왔지요.

3. 이 영화에서 인종 차별에 시달리는 정원사를 연기한 데니스 헤이스버트는 같은 시기에 [24]에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상원의원을 연기했죠. 그 때문에 동부와 서부를 바쁘게 오가며 일했던 모양인데, 자기도 잦은 지위의 변화 때문에 종종 헛갈렸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