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아이슬링 월시 Aisling Walsh

주연
샐리 호킨스....수 트린더
Sally Hawkins....Sue Trinder
일레인 캐시디....모드 릴리
Elaine Cassidy....Maud Lilly
루퍼트 에번스....젠틀맨
Rupert Evans ....Gentleman
이멜다 스턴튼....석스비 부인
Imelda Staunton....Mrs. Sucksby
찰스 댄스....크리스토퍼 릴리
Charles Dance....Christopher Lilly
데이빗 트라우턴....입스 씨
David Troughton....Mr. Ibbs
스티븐 와이트....찰스
Stephen Wight....Charles
로라 도스 산토스....아그네스
Laura Dos Santos....Agnes
스테파니 미들턴....어린 수
Stephanie Middleton....Young Sue
탈룰라 피트-브라운....어린 모드
Tallulah Pitt-Brown....Young Maud

(스포일러가 있어요...)

수와 모드

듀나 Fingersmith. 좀도둑이나 소매치기를 가리키는 19세기 영국 은어지요. 하지만 사라 워터스가 단순히 사전적 의미만 보고 이 단어를 제목으로 선택했을 리가 없습니다. 워터스의 세 번째 소설은 제목부터 노골적인 전희입니다.

파프리카 워터스가 지금처럼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도 노골적인 묘사 없이도 소재의 에로티시즘을 엄청나게 효과적으로 끌어내는 재능 때문이지요. 이 사람의 이런 재주는 [티핑 더 벨벳]처럼 솔직한 소설보다는 [핑거스미스]처럼 정통적인 멜로드라마인 척하는 소설에서 더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BBC 미니 시리즈 버전 [핑거스미스]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전희의 매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몇몇 장면들은 오히려 원작보다 효과적이기도 해요. 예를 들어 모드의 장갑을 보세요. 원작에도 모드의 장갑 묘사는 나오고 심지어 책의 커버 그림이기도 하지만, 문자 매체인 소설에서 장갑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시청각 매체인 미니 시리즈에서 장갑은 당당한 조연이지요. 언제나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때문에 장갑의 진주 단추를 하나 하나 벗기고 그 손에 키스하는,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장면은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듀나 그래도 드라마의 직설적인 묘사는 워터스가 쓴 물결치는 듯한 문장의 섹시함을 따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파프리카 네, 아마 그렇겠지요. 드라마 버전은 독립된 작품이라기보다는 소설의 반영에 불과하니까요.

듀나 미니 시리즈 버전 [티핑 더 벨벳]도 그랬죠. 하지만 [핑거스미스]의 경우 책에 종속되었다는 느낌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시리즈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작품 자체에 만족하는 대신 원작 소설이 어떤지 궁금해할 거예요.

웃기는 건 그 이유가, 이 각색물이 원작과 독립된 어떤 것이 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결과는 결코 만족스러운 편이 아니었어요.

소설과 드라마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형식에 있습니다. 워터스의 소설은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모드 릴리라는 상속녀의 재산을 갈취하려는 사기꾼 젠틀맨에게 고용되어 하녀로 변장해 시골 저택에 파견된 수 트린더라는 '핑거스미스'의 시점에서 이야기됩니다. 2부에서는 거의 같은 시간대에 일어난 거의 같은 사건들이 모드의 입장에서 기술되지요. 3부에서는 다시 수의 입장으로 돌아와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사건들을 마무리합니다.

3부작 미니 시리즈에서 이런 형식은 거의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각색자들은 그 방식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처음부터 모드와 수라는 두 주인공의 입장에서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기술하는 방법을 택했지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이런다고 이야기 구성이 특별히 덜 복잡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하여간 덕택에 제가 보고 싶었던 것들이 많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전 수의 입장에서 모드를 처음 만나고 싶었습니다. 첫 번째 국면 전환 이후에 모드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저에겐 이 순서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건 철저하게 로맨스의 논리니까요. 여전히 각색은 첫 번째 반전을 숨겨놓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흥분은 많이 사라져 버렸어요.

수 버전

파프리카 구성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 1부와 2부는 모두 중대한 국면 전환으로 끝났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주인공들의 과거를 다룬 각색 버전에서는 이게 모두 30분씩 뒤로 밀립니다. 그 때문에 2부가 너무 짧아지고 클라이막스도 지나치게 짧게 끝나 버려요.

듀나 소설을 읽을 때 클라이막스 장면이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로 옮기면 이상적일 거라고 생각했죠. 그 때문에 헐렁헐렁한 논스톱 질주가 좀 아쉽더군요.

파프리카 어차피 3시간 분량이니 시간 없는 건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르지만, 전 모드의 입장이 설명되는 2부가 짧아진 게 아쉬웠어요. 수가 모드를 사랑하게 된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런던 빈민층 바닥에서 굴러먹다 온 수에게 모드는 정결하고 아름답고 상처받기 쉽고 연약한 무언가였을 테니까. 하지만 모드는 왜 수를 사랑하게 되었던 거지요?

듀나 노골적으로 음탕한 욕망 때문이었을 걸요. 모드는 겉모습만 깔끔 떠는 빅토리아 시대 처녀지, 머릿속은 당대 유럽에서 쓰여진 거의 모든 포르노 소설들이 빼꼭하게 들어찬 아이잖아요. [핑거스미스]에서 포르노는 양날의 칼이에요. 어린 여자아이를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 여자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욕망을 거리낌없이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무기이기도 해요.

수와 모드는 하는 짓이 정말 보기완 정반대예요. 수의 경우, 모드에 대한 감정은 철저하게 로맨틱해요. 수는 높은 탑에 갇힌 순결한 공주님을 사랑하듯 모드를 사랑해요. 하지만 얌전한 상류 사회 아가씨인 모드는 처음부터 수의 육체를 원해요. 그것은 자기가 가질 수 없었고 주변에서 느낄 수도 없었던 생명력이나 친근함 정도로 완곡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결국 육체와 섹스로 귀결되지요.

하여간 모드가 수를 꼬시는 장면들을 보면 정말 "이 여우같은 것!"이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와요. 물 만난 고기처럼 지금까지 이론으로만 익혀왔던 온갖 성적 유혹의 테크닉을 하나씩 실연하고 있잖아요. 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홀라당 넘어가요. 하긴 넘어가게도 생겼어. 원래 그렇게 눈치가 빠른 애도 아닌 데다가, 걔가 살던 동네엔 모드처럼 고단수의 테크닉을 휘두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테니 말이에요.

파프리카 두 사람 다 서로를 자기가 가해자로서 가담한 끔찍한 음모의 희생자로 보고 바로 그 때문에 서로를 더 사랑하게 된다는 점도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둘의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파워게임이고 은근히 사도매저키스틱하기까지 해요.

듀나 그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어른스럽게 들리는데, 사실 둘 다 철없는 아이들이죠. 수는 거리에서 잡다한 생존술은 배웠을지 몰라도 사람 마음 속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나 깊이는 없죠. 반대로 모드는 활자를 통해 많은 지식을 쌓긴 했지만 정작 진짜 현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요. 그 때문에 둘 다 고생도 좀 하고 이야기가 끝날 무렵엔 철도 들고... 결국 이건 성장물이기도 해요. 로맨틱한 허상과 육체적인 욕망에 빠진 아이들이 온갖 일들을 거치면서 보다 현실적인 관계를 시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거죠. 그 뒤로 잘 살았으려나? 잘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빅토리아 시대는 정체 감추고 사는 게이 여성들에겐 오히려 좋은 때였죠. 아무도 그네들의 존재 자체를 몰랐으니까! 게다가 둘 다 돈도 넉넉하게 생겼고 중간에 껴서 방해할 사람들도 더 이상 없잖아요.

모드 버전

파프리카 근데 지금 우리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나요? 책? 드라마?

듀나 일레인 캐시디와 샐리 호킨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책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네요.

파프리카 둘이 아주 같지는 않잖아요. 일단 구성이 다르지요. 그밖의 디테일도 조금씩 다르고. 수와 모드는 드라마에서 조금씩 더 나이가 많아요. 모두 금발이었던 책에서와는 달리 둘다 브루넷이고요.

듀나 그 정도는 봐 줄 수 있죠. 실제로 소설 속의 수와 모드는 더 나이가 든 사람처럼 행동해요. 머리색은... 뭐, 바꿔도 상관없어요. 금발이 더 결백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그거야 문학적 설정일 뿐이니까.

더 중요한 차이점은 두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 있는데, 드라마 쪽이 더 이들에게 관대한 경향이 있긴 해요. 핑계들이 더 분명하고 노골적이죠. 다소 설정이 불확실했던 클라이막스의 살인장면도 분명히 교통정리 되었고요. 하지만 드라마가 책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파프리카 결국 드라마가 원작 소설의 반영 이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돌아가게 되는군요.

듀나 더 충실한 반영이었다면 좋았겠죠. 더 잘 다듬어진 반영이었으면 좋았을 거고. 드라마 [티핑 더 벨벳]이 더 성실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원작의 많은 부분들이 남아있고 캐스팅이 좋거든요. 특히 모드 역의 일레인 캐시디는요. 어쩜 그렇게 순진무구하면서도 여우 같은지요. 정말 그 사람의 요정 같은 얼굴은 완벽한 반전도형이에요. 1부에서 우린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불쌍한 아기 같으니. 뽀뽀해 주고 안아 주고 머리 빗겨 줘야지"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똑같은 얼굴을 보면서도 2부에서는 "사람 맘을 가지고 노는 요망한 것 같으니!"이라고 외치게 되지요. 그리고 그 둘은 모두 진짜란 말이에요.

파프리카 이멜다 스턴튼은 석스비 부인역을 하기엔 너무 날씬하지 않아요? 전 미리엄 마골리스 같은 사람을 상상했어요.

듀나 저도요. 하지만 일레인 캐시디랑 미리엄 마골리스가 모녀라고 하면 좀 이상하겠죠? 이멜다 스턴튼 정도면 설득력이 있어요. 마골리스가 했다면 지나치게 요란한 캐리커처가 되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지요. 원작과는 다르지만 화면으로 볼 때 스턴튼은 충분히 어울려요.

루퍼트 에번스가 젠틀맨 역을 하기엔 지나치게 젊고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보니까 괜찮더군요. 하긴 이런 무시무시한 유혹자들은 겉보기엔 그렇지 않아보일 경우가 많겠지요.

파프리카 에번스는 노골적인 게이로 젠틀맨을 연기했는데, 설득력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젠틀맨이 더 위험한 악당인 이유이지요. 자신의 열정에 흔들릴 이유가 없으니까요.

듀나 샐리 호킨스는 일레인 캐시디에 비해 조금 밀린 구석이 있어요. 3부가 지나치게 성급하게 달리느라 호킨스가 연기한 수의 이야기를 많이 빼먹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호킨스는 최선을 다했고 적역이라고도 생각해요. 캐시디와도 잘 맞고요. 전혀 의중을 읽을 수 없는 얼굴과 완벽하게 감정이 노출된 얼굴의 조화랄까. 물론 보다 야한 장면들에서도 잘 어울리고요.

골무 장면

파프리카 야한 장면이라고 할 때,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장면들은 노골적인 섹스신들이 아니에요. 수가 모드의 송곳니를 골무로 깎아주는 장면이나 수가 잠든 모드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장면 같은 것들이지요.

그런데 그런 거 있지 않나요? 모드가 결코 결백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청자들에게는 이 사람의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이 훨씬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지요. 왜 그런지는 구체적으로 설명 못 하겠어요. 하지만 그 이유가 모드가 쓰는 포르노 소설들 만큼 음탕하다는 건 분명해요.

듀나 골무 장면은 책에서도 노골적이었죠. 물론 모드 버전이요. 뭐든지 모드 버전이 더 야해요.

파프리카 두 번째 "You pearl!" 장면을 그렇게 요약해서 보여주는 대신, 모드의 관점에서 꼼꼼하게 재구성해도 좋았을 텐데. 훨씬 야했을 거예요. 2부가 짧아진 건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에요. 소설의 2부는 1부에서 간단히 개념만 제시된 묘사의 진짜 알맹이를 끄집어 내는 작업이잖아요.

듀나 그럴 수도 있었겠죠. 더 나은 방법도 있었을 거고. 모든 길을 선택할 수는 없어요. 미니 시리즈에서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한 거고. 그게 모자란다 싶으면 언제나 책으로 돌아가면 되지요. (05/12/26)

D&P

기타등등

워터스의 신작 [The Night Watch]가 내년 2월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