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디파 메타 Deepa Mehta

주연
사바나 아즈미....라다
Shabana Azmi....Radha
난디타 다스....시타
Nandita Das....Sita
쿨부샨 카르반다....아쇼크
Kulbhushan Kharbanda....Ashok
자브드 자페리....자틴
Jaaved Jaaffery....Jatin
란지트 초우드리....문두
Ranjit Chowdhry....Mundo
앨리스 푼....줄리
Alice Poon....Julie

듀나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생각할 때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종교적, 정신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지참금 때문에 부엌 아궁이에 머리가 박혀 살해당하는 수많은 여자들입니다.

고맙게도 [화이어]는 그런 끔찍한 상황에 대한 영화는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보지도 않았겠지요. 그런 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도 저한테는 상당히 버거운 소재입니다.

[화이어]는 직접적인 폭력을 거의 묘사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여주인공들에게 육체적인 폭력은 거의 가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남편들인 아쇼크나 자틴은 결코 가까이 하고 싶은 친구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야만스러운 바보들도 아닙니다. 여주인공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보다 은밀하고 예절바른 것들입니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관객들은 점점 더 폐소공포증에 빠져들게 되는데, 감독인 디파 메타는 바다라는 메타포를 끌어들여서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라다의 욕구를 간접적으로 표현합니다. 물론 그녀가 그 곳에서 탈출하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는 시타의 등장입니다.

파프리카 주변 상황이 너무나도 갑갑해서 라다와 시타의 사랑은 거의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입니다. 이 점이 그들 행동의 당위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레즈비언 영화들에게 흔히 쏟아지는 "그러니까 맞는 남자를 만난다면..." 따위의 진부한 반론들을 막으려면 좀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군요. 사실 [화이어]의 상황설정과 전개는 오래전부터 수많은 레즈비언 소설이나 영화들에서 너무나도 많이 봐왔던 것들입니다.

듀나 영화는 시타가 주인공인 척하면서 전개되지만 사실 실제 주인공은 라다입니다. 라다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부분의 각본은 아주 매끄럽게 구성되어 있는데, 이 부분 때문에 라다라는 캐릭터가 입체감있게 드러날 뿐 아니라 그 캐릭터에게 가해진 조용한 폭력이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바나 아즈미라는 훌륭한 배우가 자기 역할을 하고 있지요. 아즈미는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부분입니다.

파프리카 맞아요. 하지만 그에 비하면 다른 캐릭터들은 종이처럼 얇습니다. 두 남편들과 문두 뿐만 아니라 시타도 그렇게 깊이 있게 다루어진 캐릭터는 아닙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시타가 라다에게 그렇게 쉽게 구애를 할 수 있었는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듀나 그 캐릭터는 아직 사랑에 대한 로맨틱한 환상을 품고 있었으니까요. 그 상황을 '로맨틱'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파프리카 설명하기는 쉽지요. 하지만 관객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조금 더 나가야 하지 않았을까요? 결국 러브 스토리는 자위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시타의 캐릭터가 더 잘 살았다면 시타에 대한 라다의 애정이 좀 더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것이고 '러브 스토리'의 기능도 보다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었겠지요.

듀나 결국 이 이야기는 메세지를 담고 있건 없건 기질적으로 로맨틱한 러브 스토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가끔 시타가 상당히 '정치적'인 발언을 직설적으로 내뱉을 때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사실 문제될 건 없지만 한마디로 분위기를 좀 깨지요.

[화이어]는 인도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삶의 억압을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겠지만 주인공들이 선택하는 길은 로맨틱한 도피입니다. 결국 디파 메타도 가부장제도를 물리치기 위해 모두 레즈비어니즘을 택하라! 식의 대안을 제시한 건 아닐테니까요.

그러나 그건 개인적으로 올바른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라다와 시타가 그 길을 택한 것이었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그 길을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가부장제도에서 벗어나려면 레즈비어니즘밖에 방법이 없는 건 아닐텐데" 어쩌구 하는 식으로 맞서는 건 매우 속좁은 반응입니다.

적어도 우린 영화의 결말을 조금 넓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영화가 다루는 것이 개별상황에 대한 개인의 이야기라는 것을 잊는 때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영화는 정치 교과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파프리카 [화이어]는 인도 감독과 인도 배우들이 만든 인도 영화지만 인도 영화의 한 흐름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어딘가 이안의 [음식남녀]에서 맡을 수 있는 서구적인 체취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디파 메타가 오랫동안 캐나다와 미국에서 작업을 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게다가 이 영화는 영어 영화잖아요. 전 인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집안에서 영어보다는 힌두어를 더 흔하게 쓰지 않을까요?

영화가 '서구적'이기 때문에 그런 부류의 영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화이어]는 보다 받아들여지기 쉬운 영화입니다. 적어도 [화이어]는 기술적으로 잘 만든 작품입니다. 여기에는 잘 짜여진 각본과 적절한 로맨스와 유머, 그리고 좋은 배우들이 있습니다. 참, 아까 문두의 캐릭터가 얇다고 했지만 그를 연기한 란지트 초우드리는 재미있는 배우였습니다.

듀나 메시지야 어찌되었건 이 영화는 두 연인이 역경을 헤치고 결국 해피 엔딩에 골인하는 고전적인 멜로드라마입니다. 오래간만에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류의 영화를 보니까 괜히 기분이 좋더군요.

파프리카 어련하려구요. (97/05/12)

D&P

기타등등

나중에 디파 메타는 [화이어]의 영어 대사에 대해 대충 다음과 같이 해명했습니다.

"I am a victim so to speak, of a post-colonized India. The medium of my education was English. In fact, not unlike many children of middle-class parents, English was my first language and Hindi, my second. I wrote the script of FIRE in English, a language I am totally at ease with. The difference is in the kind of English. In India, we do not speak pukka English. We've made the language our own. It's totally colloquial and has many phrases that are distinctly Indian. We call this happy amalgamation Hinglish.

I thought about translating FIRE into Hindi, but more for the Western audience rather than the Indian one. Western audiences find a 'foreign' film easier to imbibe, easier to accept in its cultural context, if it is in its indigenous language. 'A foreign film can only be a foreign film if it is in a foreign language.' And if it isn't, then somehow it is judged (albeit subconsciously), as a Western film disguised as a foreign one. All very complex but true to a large extent. Well, how to explain to people in the West that most middle-class Indians speak Hinglish? Eventually, I decided to go for the authenticity of spirit of FIRE rather than peoples expectations of what a foreign film constitutes."

여러분도 저희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유익한 교훈을 얻으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