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황규덕

주연
정경호....현수영
김민선....삐삐소녀
차수연....수지
김대원....노란샤쓰
정진영....현수영

수영과 삐삐소녀

[별빛 속으로]는 올해 나온 한국영화들 중 가장 재미있는 귀신 영화입니다. 괴상하죠. 이 영화는 일단 호러영화가 아니고 주류 충무로 영화도 아닌데다가 감독이 황규덕입니다. 황규덕이 만든 장르 영화를 상상하실 수 있겠어요? 정 안 되신다면 이 영화를 보시면 됩니다.

영화의 시대배경은 1979년입니다. 황규덕 같은 연배의 사람들이 향수에 젖어 역사 이야기하기 딱 좋은 시절이죠. 하지만 영화는 당황스럽게도 당시의 시국 묘사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학교 벽에 떡 걸려 있는 박정희 사진, 국기에 대한 맹세, 학생 데모와 같은 것들이 조금씩 더해지며 당시의 분위기를 그려내지만 영화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차원에 머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시골출신의 가난한 대학생 수영입니다. 수영은 우연히 같은 과목을 듣던 삐삐소녀에 매료되지만 삐삐소녀는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요. 그런데 그 뒤로 수영에게 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죽은 삐삐소녀가 다시 수영앞에 나타나고 수영은 그녀의 인도를 받아 수지라는 소녀의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그 아이나 그 아이가 사는 집의 분위기가 영 이상한 거죠. 과외를 주선해준 수지의 오빠라는 사람도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고요.

처음엔 70년대 대학생들을 그린 구닥다리 멜로드라마처럼 보이던 이야기가 여기서부터는 거의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작가들이 썼을 법한 꿈결같은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순진무구한 젊은이가 (그것도 독문학도입니다) 유령의 안내를 받아 고풍스러운 대저택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서 속내를 알 수 없는 아리따운 소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영화는 수영의 경험담들을 적당히 느슨한 꿈의 논리로 이어가며 전개하고 있는데 그게 꽤 잘 먹힙니다.

이런 설정은 이야기 전체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황규덕은 그 함정을 아주 쉽게 피해갑니다. 장르를 존중하는 리얼리스트의 감각이라고 할까요? 그는 투덜거리며 장르 관습을 맥없이 따라가는 대신 판타지의 영역을 존중하며 그 안에 리얼리즘과 역사의 질감을 새깁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세계는 믿음직하면서도 새롭습니다.

단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여성 캐릭터들은 조금 더 깊이 있게 묘사될 수도 있었습니다. 도입부의 나비 상징은 좀 지겹고 그걸 표현하는 컴퓨터 그래픽도 그렇게 설득력 있는 편은 아닙니다. 액자 형식을 구성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는 필요이상의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 국면 전환은 좀 싱거운 구석이 있고요.

그러나 이런 단점은 지엽적입니다. [별빛 속으로]는 좋은 판타지 영화이고 좋은 멜로드라마예요. 충무로 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저예산으로 만들어졌지만 때깔은 은근히 좋고 (특히 수지의 저택은 근사합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자연스럽게 영화의 내용 속에 녹아듭니다. 무엇보다 판타지와 호러 영역을 다루는 또다른 방법을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07/07/26)

DJUNA

기타등등

엔드 크레딧을 보면 중년의 수영을 연기하는 정진영은 '우정출연'이 아니라 '의무출연'이라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