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마이클 크리스토퍼 Michael Cristofer

주연
안젤리나 졸리....지아 카란지
Angelina Jolie....Gia Carangi
엘리자베스 미첼....린다
Elizabeth Mitchell....Linda
메르세데스 룰....캐슬린
Mercedes Ruehl....Kathleen
페이 더너웨이....윌헬미나 쿠퍼
Faye Dunaway....Wilhelmina Cooper

1.

지아 마리 카란지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지금 몇 살인가요... 60년생이니까 아직 30대 후반이겠네요. 지아는 셰릴 틱스나 이자벨라 로셀리니보다 젊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조금만 더 버텨냈다면 지금쯤 선구적인 수퍼모델로 대접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레즈비언 쉬크가 한참 유행인 90년대 말에 다시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을지도 모르고 신디 크로포드가 지금처럼 유명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아 마리 카란지는 86년에 에이즈로 죽었고 혜성같이 화려했던 그 사람의 경력은 아쉬울 정도로 짧았습니다. 지아의 진짜 인생 중 제가 막 지어냈던 평행 인생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우리가 그 사람을 한물간 패션 모델 대신 거창한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안젤리나 졸리가 그 사람 역을 하는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 정도겠네요. 하지만 죽은 뒤에 그래봤자 그게 무슨 소용인가요.

2.

미국 케이블 텔레비전 시간표를 가끔 들여다보면, 전기 영화들이 모두 케이블로 달아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라스푸틴(지금 극장 상영되고 있는 [라스푸틴]의 전기 영화도 미국에서는 케이블로 방영되었습니다)에서 유방확대수술의 고안자까지, 정말 별별 사람들의 삶이 다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전기 영화는 여러모로 케이블에 유리한 장르니까요. 대상의 유명세와 소재의 특이성에 약간의 스타들을 첨가하면 손쉽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으니 첫 시선 끌기가 뒷감당 걱정보다 더 중요한 이 동네에서는 오히려 환영받을 만한 장르라고 해야겠지요. 극장용 영화보다 기동성이 뛰어남은 물론이고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쪽에서 보더라도 유리한 점은 꽤 됩니다. 길이에 신경을 덜 써도 되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뜸 들여가며 할 수 있고 비극적인 결말도 부담없이 담을 수 있으니까요.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손해볼 건 없네요. 아무리 애슐리 저드와 미라 소비노같은 스타가 나온다고 해도, 누가 마릴린 먼로 전기 영화를 보러 극장까지 가겠습니까?

3.

지아 마리 카란지의 삶을 간단히 정리하면 대충 다음과 같을 겁니다. (1)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아주 잘 나가던 패션 모델이었고, (2) 동성애자였으며, (3) 마약중독자였고, (4) 주사바늘을 돌려가며 쓰다가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아직 AIDS라는 이름도 익숙하지 않았던 때인 1986년에 그 병으로 죽었지요.

흠, 쓰고 나니 참 허무하군요. 아무리 26살의 나이에 죽은 여자의 삶이라도 이보다는 분명 더 복잡하기 마련인데. 그러나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마이클 크리스토퍼의 영화가 바로 이런 순서를 밟아올라가는 작품이니 이렇게 한 번 요약해봐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아요.

4.

마이클 크리스토퍼는 지아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지아의 끔찍한 삶을 통해 겉만 번지르르한 패션계를 비난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 주제는 극중 인물의 대사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잡지에서 당신의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당신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살아오면서 어느 누구도 잡지에 나오는 여자같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지. 심지어 당신마저도 그럴 수 없었어. 그런 잡지에는 경고문을 붙여야해. '경고! 이 사진들은 진짜가 아님!'"

에헴. 전 패션 잡지를 보면서 그 사진들이 현실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요. :-) 하지만 또 모르죠, 뭐. 게다가 마이클 크리스토퍼가 정말 순진하게 패션 잡지가 가짜를 생산한다고 비난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는 단지 우리가 은근히 즐기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입니다. 패션계같은 화려한 세계도 슬쩍 뒤를 보면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보다 더 끔찍하고, 지아와 같은 수퍼 스타도 에이즈가 걸린 정키가 되어 죽어갈 수 있다는 거죠. '성공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독약'이라는 제목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들은, 그 비극성으로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잘나고 잘생긴 사람들에 대한 비생산적인 질시를 잠재우게 해주기까지 하니 여러 모로 유익하다 하겠습니다.

패션계가 지아의 죽음을 재촉했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비극의 씨앗은 원래부터 지아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지아는 패션계에 오기 전부터 마약 중독자였고 그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간 정신없는 성격 또한 원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지아와 같은 세계를 살았으면서도 멀쩡하게 버텨내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이만이나 크리스티 브링클리 같은 사람들을 보세요.

이런 이야기는 두 개의 축을 따라 전개되어야 합니다. 가로축으로는 주인공의 내재된 결함을 묘사하고, 세로축으로는 그런 결과로 주인공을 몰고 간 외적인 요소를 다루어야 하죠. 어느 쪽이건 부족하면 이야기는 절름발이가 됩니다.

[지아]가 절름발이라면, 지아가 속해있던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의 패션계 묘사가 매너리즘으로 일관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비판을 하려면 비판의 대상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아]에서 패션계는 안개처럼 막연할 뿐입니다. 그 결과 아이디어는 있지만 그게 충분히 구체화가 되지는 못하는 거죠.

그래도 영화는 가끔 정곡을 찌르는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가장 끔찍한 장면은, 약에 절어 반쯤 의식불명인 지아를 인형처럼 움직이며 사진을 찍어대는 독일 사진작가들의 묘사입니다. 이 장면은 정말 강간처럼 보이고 지아를 스타로 만들었던 그 사람의 화려한 직업을 그 연장처럼 여겨지게 만들죠.

하지만 일반론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아는 결코 사진작가들이 하라는대로 얌전히 움직이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니까요. 아더 앨고트나 프란체스코 스카불로(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가 지아의 마지막 [코스모폴리탄] 커버 사진을 찍는 장면이 영화에 나오기도 하죠)같은 사람들은 예측불허이고 멋대로였던 지아의 행동을 그립다는 듯 회고하곤 하니까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고 마네요. 지아는 '매력적인 몰락'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단점들(심지어 그 사람이 정키였다는 점까지도)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매력의 일부였으며 직업적 장점이었으니까요. 결국 지아의 비극이 특수한 외부상황과 성격의 단점이 맞물리며 돌아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일반화보다 개인의 이야기를 읽는 편이 더 쉽습니다.

5.

지아는 유명한 동성애자였고 그건 당시에도 비밀이 아니었죠. 이 영화에서도 지아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데에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는데, 실망스럽게도 지아의 사생활은 가장 불만스럽게 묘사된 부분입니다.

크리스토퍼는 지아의 애인들을 모두 묶어서 한 명으로 만들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미첼이 연기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린다가 바로 그 사람인데, 과연 그게 옳은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아의 실제 애인들은 다들 나름대로 분명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니 그 사람들을 모두 등장시켰다면 주인공의 삶을 효율적으로 묘사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린다는 한 점에 고정되어 있고 그 캐릭터가 우리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시점 역시 제한적입니다. 게다가 이 캐릭터는 너무나도 깔끔하게 소독되어 있어서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린다는 마치 하얀 날개를 팔랑거리며 주인공 주변을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레즈비언 천사 같습니다. 지아와 말년의 고통을 나누었던 마지막 애인 로셸(프라이드가 쓴 지아의 전기에 나온 가명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말입니다만)과는 달리 린다는 심지어 지아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그 결과 지아의 말년 묘사는 꽤 밍밍하게 삭아 버렸습니다. 지아의 말년은 영화에서 나온 것보다 훨씬 끔찍했고 로셸과의 관계도 그렇게 고상하고 얌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지아와 린다의 섹스신도 그렇게 즐겁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닌데,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섹스신을 묘사하는 크리스토퍼의 시점이 불쾌할 정도로 밖에서 겉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캐릭터는 사라지고 카메라 앞에는 섹스하는 두 육체만 남아 버렸어요. 졸리와 미첼의 '몸사리지 않는' 연기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그냥 소프트 포르노의 한 장면처럼 보일 뿐입니다. 제가 본 버전은 HBO 방영용이어서 유럽 극장 개봉판에서 볼 수 있는 몇몇 장면들이 삭제되었다고 합니다만 별로 아쉽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6.

탈색되고 조금은 단선적인 스토리와 표준화된 스타일(점프 컷과 흑백 화면의 삽입은 이제 패션계를 다루는 영화의 매너리즘으로 굳어버린 모양입니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힘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주연 배우인 안젤리나 졸리의 덕입니다. 지아는 졸리의 두 번째 게이 역인데, 지나 거숀처럼 이미지가 굳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레즈비언 부치 역에 잘 어울립니다. 같이 본 몇몇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지아와 외모도 충분히 닮았고요. 단지 후리후리했던 실제 지아에 비해 키가 좀 작아서 몇몇 장면들은 약간 위태롭더군요.

키나 등신이 어쨌건, 이 영화의 졸리는 아주 훌륭합니다. 적어도 지난 1년 동안 '지옥으로 떨어지는' 역을 이처럼 훌륭하게 해낸 배우는 본 적 없습니다. 단순히 에너지로 몰아붙이는 면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적어도 그 효과는 충격적입니다. 게다가 졸리는 아직 젊은 배우이므로 앞으로 훨씬 많은 것을 기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지아의 어머니 역을 연기한 메르세데스 룰도 아주 설득력있습니다. 아까는 린다의 캐릭터에 대해 빈정거렀지만 엘리자베스 미첼도 '레즈비언 천사'로는 나무랄 게 없어요. 하지만 윌헬미나 쿠퍼를 연기한 페이 더너웨이는 자신의 매너리즘을 안이하게 끌어 쓴 듯한 인상을 줍니다.

7.

지아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필라델피아의 기자 스티븐 프라이드가 지아 마리 카란지의 전기 [Thing of Beauty]를 출판했습니다. 그 책은 죽음과 함께 곧 사라질 것만 같았던 지아의 이름을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만들었습니다. [Thing of Beauty]는 곧 패션계의 추악함을 다룬 가장 잘 알려진 책이 되었고 지금도 그런 목적으로 종종 인용되는 작품이기도 하죠.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책은 패션계의 추악함이나 마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로만 기능하지는 않습니다. [Thing of Beauty]의 독자들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지아의 삶이 로맨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마약으로 범벅이가 된 삶을 살아가며 지아의 막 나갔던 인생에 경의를 표하는 모델 무리들까지 생겼으니까요. 그네들은 자기들을 '지아의 아이들 Gia's Girls'이라고 부른답니다! 이것보다는 덜 위험하지만 보다 온화한 수준의 로맨티시즘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지아 마리 카란지의 사이트를 하나 찾았는데, 그 사이트의 작가는 지아의 사진들 사이사이에 요절한 여성들을 그린 에드가 앨런 포우의 로맨틱한 시들을 잔뜩 끼워 놓았더군요.

아시겠어요? 몰락의 기술은 결코 교훈적일 수만은 없답니다. 크리스토퍼가 "아, 지아가 마약을 끊고 돈도 잘 관리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아 행복하게 살았을텐데" 따위의 생각만 했다면, 이런 영화는 만들어지지도 않았겠지요? (98/03/24)

DJUNA

기타등등

1. 안젤리나 졸리와 페이 더너웨이는 [지아]로 99년 골든 글로브 드라마 & 미니 시리즈 부분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2. 미국에서 출시된 [지아] 비디오 버전은 HBO 방영당시 삭제되었던 장면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