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송일곤

주연
장현성....장현성
이소연....이소연
조성하....삼촌
배수경....탱고여인

현성과 소연

송일곤의 가장 큰 적은 송일곤 자신입니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예술가 송일곤이 날개를 치며 날아오르려 할 때마다 심각하고 관념적인 '예술영화감독' 송일곤이 그를 아래로 잡아끌었죠. 그의 영화들은 그가 생각을 오래하고 고민을 많이 할 때마다 쓸데없는 무게를 얻어 주저 앉았습니다.

[깃]은 그런 악순환에서 송일곤을 해방시켜준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원래 환경영화제가 [1.3.6]이라는 제목의 옴니버스 영화를 위해 위촉한 작품이죠. [거미숲]을 막 끝낸 그는 30분짜리 디지털 소품이어야 할 이 영화를 70분이 넘는 장편으로 완성해 올려보냈습니다. 영화제 사람들은 황당했을 거예요. 게다가 이 영화엔 환경에 대한 어떤 메시지도 없는 걸요. 그냥 남해의 아름다운 풍광이 배경으로 등장할 뿐이죠.

환경 옴니버스 영화가 어떻게 되었건, 송일곤에게 이건 굉장한 기회였습니다. 저예산으로 10일만에 뚝딱 영화를 찍다보니 관념주의자인 예술영화 감독 송일곤이 간섭할 기회가 사라져버린 거죠. 장르 공식과 예술영화의 자의식, 기성품 주제로 조금씩 절룩거렸던 그의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 [깃]은 가볍게 날아오릅니다.

영화는 현성이라는 무명의 영화 감독이 80년대를 무대로 한 시대물의 시나리오를 쓰려고 끙끙거리다가 10년 전에 여자친구와 왔다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우도의 작은 모텔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미 독일인 지휘자와 결혼한 유부녀인 여자친구가 10년 전의 약속을 지킬 것인지 확신하지도 못한 채 모텔에 죽치던 그는 아내가 떠난 뒤 실어증에 걸린 삼촌 대신 모텔을 운영하는 재수생 소연에게서 또 다른 감정을 느낍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깃]은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운 영화입니다. 그의 전작 [꽃섬]과 [거미숲]은 처음부터 회사 모토처럼 정해진 관념적인 주제와 그를 위해 빌려온 장르 공식에 의해 구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깃]을 구속하는 건 거의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10년만의 재회라는 기본 설정도 족쇄가 되지는 못해요. 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은 현성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소연이니까요. 영화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로맨스로 흘러가지만 그래도 영화는 꽤 넓은 길을 한가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저 같으면 결말을 조금 열어놓았겠지만 지금의 결말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송일곤의 이전 작품들을 특징짓는 초현실주의는 이 영화에도 있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등장한 공작이나 미친 마법사와도 같은 소연의 삼촌, 모텔에 배달된 수수께끼의 피아노와 같은 것들 말이죠. 그 중 절정은 소연이 파트너 없이 옥상에서 혼자 추는 탱고입니다. (파트너의 빈 자리가 드러나자 탱고는 은근히 한국 무용처럼 보이더군요. 포스터를 한 번 보세요.) 이전 같았다면 이런 비현실적인 장치들은 예술감독 송일곤이 덮어씌운 묵직한 주제와 인공적인 설정에 시달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억지스러움이 많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느껴지더라도 애교로 봐줄 수 있는 정도고요.

[깃]은 가벼운 영화입니다. 감독의 이전 작품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당황할 정도로 경박한 농담들을 많이 담고 있기도 하죠. 그 농담들이 자기만의 날카로운 위트를 갖춘 건 아니지만 괜찮습니다. 영화가 어깨 힘을 쭉 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송일곤의 이전 장편들처럼 [깃] 역시 여성적인 이미지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실제 여성보다는 여성적 관념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영화의 소연은 실제로 살아 숨쉬는 진짜 여성보다는 지친 예술가를 위로하는 여신이나 요정과 같습니다. 단지 이 캐릭터를 연기한 이소연은 이 단순한 설정에 생생한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습니다. 감독의 모습을 그대로 따온 듯한 장현성의 사실적이고 가라앉은 연기와 이소연이 발산하는 발랄한 화사함의 대조는 훌륭합니다.

[깃]은 송일곤의 최대 걸작일까요? 흠, 질문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깃]은 '최대'라는 말에 어울리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만큼이나 작고 가벼우며 야심도 없는 소품이지요. 하지만 [깃]이 지금까지 나온 송일곤의 장편들 중 예술적인 형식과 의도가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룬 작품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합니다. (04/12/29)

DJUNA

기타등등

어제 시사회에서는 DLP로 상영되었는데 화질이 아주 나빴습니다. 송일곤 감독 말로는 원래 의도보다 30퍼센트 정도 어둡다고 하더군요. 극장에 필름 상영될 때는 화질 문제도 해결될 거라고 합니다. 재편집의 가능성도 있다고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