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롤프 쉬벨 Rolf Schübel

주연
에리카 마로잔....일로나
Erika Marozsán....Ilona
요아킴 크롤....라즐로
Joachim Król....László
벤 베커....한스 비크
Ben Becker....Hans Wieck
스테파노 디오니시....안드라스
Stefano Dionisi....András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글루미 썬데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매료되었던 기억이 나요. "옛날에 어떤 작곡가가 [글루미 썬데이]라는 곡을 작곡했는데, 그 곡이 너무 우울해서 그 곡을 들은 수백명의 사람들이 자살하고 그랬대." 책에서 읽은 게 아니라 친척 아줌마한테서 옛날 이야기로 들었던 정보라, 전 이 이야기가 한동안 실화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답니다.

하지만 그 곡은 정말로 존재했습니다. 그 곡을 듣고 3,40년대를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유행처럼 자살했던 것도 사실이었고요.

왜 짧은 유행가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그토록 가볍게 목숨을 던졌을까요? 꼭 곡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30년대는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지기 딱 좋은 시절이었지요. 경제적으로는 최악이었고, 파시즘과 나찌즘이 서서히 유럽을 덮어가고 있었고, 전쟁은 코 앞에 다가오고 있었고... 이 우울한 시대에 그 사람들 정서에 딱 들어맞는 마자르 풍의 우울한 음악이 나왔으니 옳다꾸나하고 목숨을 끊은 거죠. 이게 하나둘씩 반복되다보니 그것도 유행이 되었고요. 자살도 유행이 된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소동을 생각해보세요.

[글루미 썬데이]는 바로 악명 높은 이 노래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입니다. 아이디어만 따진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수없이 나왔던 가요 제목 영화들과 특별히 다를 게 없습니다. 스토리가 대부분 픽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유행가 버전 [셰익스피어 인 러브]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이 영화에 따르면 [글루미 썬데이]는 라즐로 자보라는 유태인이 운영하는 부다페스트의 한 식당에서 탄생했습니다. 자보와 식당 피아니스트인 안드라스는 모두 웨이트레스인 일로나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일로나의 생일날 안드라스가 그 곡을 생일 선물로 바쳤던 거죠. 왜 생일날 그렇게 우울한 곡을 주었을까요? 전 모릅니다.

하여간 영화는 일로나의 복잡한 남자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원래 일로나는 자보의 애인이지만 중년에 접어든 그는 자신이 그녀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 안드라스가 일로나를 사랑하자 그와 함께 그녀를 공유하죠. 그런데 여기서 일로나를 짝사랑 하던 독일인 한스가 SS 대원이 되어서 나타나 일로나에게 달라붙습니다.

일로나의 세 남자들은 3,40년대를 살던 특정 부류의 남자들을 대표하는 듯 합니다. 현실적인 유태인 사업가, 이상주의자인 헝가리인 예술가, 부패한 독일인 나찌 장교... 뭐, 이런 식이지요. 일로나를 사랑하고 소유하는 방식도 그들의 삶을 반영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연애담은 꽤 보편적인 의미로 기능하게 되었어요. 일로나가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를 임신하는 장면은 그래서 재미있군요.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 아이는 세 사람 모두의 아이일 겁니다.

그렇다면 노래는? 그게 좀 그렇습니다. 사실 노래는 보기만큼 큰 의미가 없어요. 사람들은 노래를 듣고 죽어나갑니다. 안드라스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죄의식을 느끼고, 다른 극중 인물에게도 각각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먼 옛날 친척 아줌마가 저한테 들려주었던 "사람들이 그 노래를 듣고 죽었대'라는 옛날 이야기보다 힘이 없군요.

이유는 하나인 듯 합니다. [글루미 썬데이]는 짧고 인상적인 작은 곡입니다. 그러나 영화 하나를 이 곡으로 채울 수 있을만큼 내용이 많은 곡은 절대로 아니지요. 이 곡에 어울리는 이야기의 양은 "그래서 사람들이 노래를 듣고 죽었대"가 딱입니다. 그 이상이 되면 필요 이상으로 길고 산문적인 '설명'이 되지요. 차라리 곡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지우고 분위기로만 일관했었으면 당시 사회를 기술하는 훨씬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을 거예요.

사실 영화는 곡에서 떨어질수록 더 잘 먹힙니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꽤 재미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사각 관계도 그만큼 흥미로우니까요. 중심이어야 할 안드라스가 좀 재미가 떨어지긴 하지만, 자보와 한스는 다릅니다. 라즐로 자보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걸 절제할 줄 알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연인인데, 연애 영화라는 장르에서는 꽤 드문 인물형이라 더 호감이 갑니다. 한스도 홀로코스트 소재의 영화에 나오는 나찌 장교로서는 꽤 재미있는 인물입니다. 악의 화신이나 미치광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상적인 반항아도 아니니까요. 그는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부패한 남자지만 괴물은 아닙니다. 쉽게 타락할 수 있는 마음 약한 보통 남자일 뿐이죠.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특별히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보통 사람들이 역사의 차가운 광기 속에 말려들어 서로를 때려잡던 그 참혹한 시기에 대한 슬픈 회고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를 장식하는 단죄 장면이 좀 불만입니다. 인과응보가 내려지면 지금까지 벌어졌던 이야기들은 모두 선악 대립으로 축소되어 버리니까요. 영화가 그토록 유지하고 싶었던 노래의 분위기와도 맞지 않고요. (00/10/31)

DJUNA

기타등등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나찌즘과 같은 무시무시한 광기 속에서 사람들이 숨을 쉴 수 있었다면 그건 한스와 같은 부패한 보통 사람들이 뚫은 구멍 때문일 겁니다. 사람들이 어디에서도 부패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시대에선 희망일 수도 있죠. 적어도 부패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