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라호범

주연
이정현....수연
김꽃지....예림
김래원....현우
조형진....병호
조민상....진국
김제동....재경
이선영....나레이터

수연

2000년에 나온 호러 영화들 중 가장 덜 떨어진 영화를 뽑으라면, 그건 [하피]입니다. 물론 이를 갈면서 [찍히면 죽는다]를 추천하고 싶어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영화는 [하피]만큼 '덜 떨어졌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잖아요?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줄거리 소개. [하피]는 무비텐이라는 고등학교 호러영화 동호회 회원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절반은 현우를 가운데에 둔 수연과 예림의 삼각관계 갈등이 중심이고, 나머지 절반은 이들이 호러영화를 찍으러 간 별장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이 장식합니다.

아주 개략적으로만 소개한 위의 줄거리만으로는 이 영화의 질이나 성격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좋은 호러영화일 수도 있고 나쁜 호러영화일 수도 있죠. 진지한 영화일 수도 있고 얄밉게 장르를 꼬집어대는 패러디일 수도 있고요.

문제는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기획에서 개봉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자기네들이 무얼 만드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건 그 결과에 아무도 만족하지 못했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고요. 영화의 채팅 장면에서 엉뚱하게 Allan Smithee라는 이름이 튀어나오거나, 주연 배우들이 창피해서 홍보 행사를 피해 달아났다는 소문이 돈다면 알 만 하죠.

필요 이상의 추측은 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쓸데없이 루머를 흘리지도 않을 거고요. 하지만 이 영화의 초반 기획이 제작 기간 중 변형된 과정은 최종완성본의 다층구조와 연결되어 있음이 거의 분명합니다.

우선 이 영화가 아주 순수한 '정파'를 지향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분명 호러영화 동호회라는 설정을 이용해 [스크림]처럼 장르를 흔들어보려는 시도는 시작부터 있었을 겁니다. 영화 촬영이라는 트릭을 이용해 현실과 영화 촬영 작업을 뒤섞으려는 시도도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겠고요.

하지만 영화가 처음엔 어느 정도 심각함을 품고 있었다는 단서들도 존재합니다. 부잣집 딸이지만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수연과, 학교에서는 두목처럼 행세하지만 '품위유지비'를 위해 원조교제까지 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집의 아이인 예림의 대립같은 것들은 분명 일정한 깊이를 의도한 것입니다. 이정현, 김꽃지, 김래원과 같은 배우들이 출연을 고려했던 것도 그런 진지함을 담은 처음 기획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죠.

아마 촬영 도중 이 뼈대가 흔들리기 시작한 게 아닐까요? 감독과 제작자들의 의견 불일치 때문일까요? 아무런 호러 자극 없이 지나치게 길어진 도입부에 제작자들이 불만을 품었던 걸까요? Allan Smithee라는 이름이 튀어나온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이유가 무엇이건 촬영 도중 영화가 작정하고 코미디로 돌변했다는 것이죠. 아마 호러 자극이 부족하니 다른 자극이라도 하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미 처음부터 코미디의 설정은 있었을테니 아주 쉬운 선택이었겠지요. 코미디는 갑작스러운 스토리 변형 때문에 발생한 스토리의 갭을 메울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영화는 서툰 코미디로 흘러갑니다. 가장 노골적인 농담은 이선영의 나레이션입니다. 종종 화면이 정지되면 나레이터가 심각한 목소리로 지금 나오는 장면의 허구성을 폭로하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논평하기도 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싱거운 농담을 던지기도 하는 거예요. 한국판 [스크림]으로 시작했을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호러버전 [구루구루]로 변신한 것이죠.

이 영화엔 그밖에 다른 싱거운 농담들도 많습니다.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음향 효과, 이유도 없이 등장하는 간접 광고... 그러다보니 원래 의도였을 장르 농담은 오히려 여기에 묻혀져 잘 보이지 않을 지경입니다. 진지하게 다루었다면 조소감이 되었을 후반의 반전이 다른 농담들에 감염되어 심심한 농담처럼 보이는 건 다행인 걸까요?

이 영화가 소수의 '팬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코미디의 질감 때문입니다. 분명 이 농담들은 일부러 조잡하게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 영화가 [스크림] 이후 세대 호러 관객들에게 공공연한 윙크를 던진다고 해도 이 '포스트모던한' 농담들이 그 의도를 망가뜨릴 정도로 서툴고 조잡하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죠. 그 때문에 필사적으로 앨런 스미시 영화가 되고 싶어하는 이 작품의 농담들은 거의 50년대 Z급 컬트 영화들에 맞먹는 순수함을 풍깁니다. 진짜로 못 만든 영화의 그 투박하고 순진한 느낌 말이에요. (04/02/16)

DJUNA

기타등등

다음 주에 다룰 2000년 한국 호러 영화는 [찍히면 죽는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