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Akira Kurosawa

주연
미후네 도시로....곤도 킨고
Toshirô Mifune....Kingo Gondo
나카다이 타츠야....토쿠라 경부
Tatsuya Nakadai....Chief Detective Tokura
타사와 쿄코....곤도 레이코
Kyôko Kagawa....Reiko Gondo
미하시 타츠야....카와니시
Tatsuya Mihashi....Kawanishi
키무라 이사오....아라이 형사
Isao Kimura....Detective Arai
이시야마 켄지로....'보슨' 타구치 부장 형사
Kenjiro Ishiyama....Chief Detective 'Bos'n' Taguchi
카토 타케시....나카오 형사
Takeshi Kato....Detective Nakao
야마자키 츠토무....타케우치 긴지로
Tsutomu Yamazaki....Ginjirô Takeuchi

협박 전화

[천국과 지옥]의 원작은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중 한 권인 [King's Ransom]입니다. [왕의 몸값]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소설에서는 말장난이죠. 주인공인 구두회사 중역 이름이 더글러스 킹이니까요. 소설에서 킹은 전재산을 털어 회사를 거머쥘 도박을 하려는 바로 그 순간 아주 곤란한 입장에 말려들고 맙니다. 누군가가 운전사의 아들을 킹의 아들로 착각하고 유괴한 뒤 어마어마한 몸값을 요구했던 거죠. 과연 킹은 자기 자식도 아닌 아이를 위해 전재산을 날려야 할까요?

영화 [천국과 지옥]도 소설의 설정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영화는 대충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1부에서는 유괴 사건에 말려든 구두 회사 중역 곤도의 딜레마를 다룹니다. 2부에서는 유괴사건의 범인을 잡으려는 형사들의 노력을 담고 있고요.

스토리가 전개되는 방식은 영화나 소설이나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익숙한 87분서의 무대를 떠나자 이야기의 의미는 상당히 달라졌지요. 소설 속에서 킹과 87분서 형사들의 비중은 거의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비중은 곤도에게로 옮겨갑니다. 수사 과정은 여전히 상당한 밀도로 묘사되지만 그를 담당한 형사들은 얼굴없는 무개성한 집단에 가깝지요.

그러는 동안 영화는 일종의 매정한 야비함을 풍기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인물은 곤도입니다. 물론 납치된 아이와 아이의 아버지도 고생이 대단하지만 그들의 고민은 그렇게까지 입체적인 건 아니죠. 생애 최악의 입장에 서서 한 사람의 목숨을 건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은 여전히 곤도입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곤도는 거의 소외되어 있어요. 선택 이후 그가 해야 할 일 자체가 없긴 하니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렇다고 후반부가 범인이나 형사들을 특별히 깊이있게 묘사하는 건 아니거든요. 나중에 우린 범인의 고백을 듣긴 하지만, 그 정보가 1부에서 우리가 얻은 것보다 특별히 더 자세한 것도 아니고요. 영화의 매정한 하드보일드의 느낌이 소설보다 강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세계는 주인공의 고민이 끝나고 그의 역할이 사라져도 계속 건조하게 움직입니다.

영화의 무정한 느낌은 영화의 계급 묘사에 오히려 더 흥미진진한 톤을 더해주기도 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언덕 위의 큰 집에 사는 부유한 곤도입니다. 유괴범 역시 신세한탄을 늘어놓으며 감상적인 태도를 취하는 짓 따위는 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빈민가를 내려다보는 부유한 집안의 저택의 대비는 여전히 강렬하고, 표면상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영화의 건조한 사건 전개 덕택에 이들이 사는 세계의 날카로운 계급 묘사는 오히려 더 명쾌해집니다.

터프한 싸나이들의 마초 분위기도 구로사와의 영화가 조금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영화의 일본색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천국과 지옥]은 쓸데없이 남성적 폭력을 과시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남자들의' 명예와 전문가들의 노련함을 무척 일본식으로 예찬하고 있지요. 보고 있으면 귀엽기까지 합니다. 특히 곤도에 대한 '인정 형사'들의 감상적인 태도는요.

[천국과 지옥]은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인상적인 상징으로 짜여진 근사한 스릴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해봐요. 과연 에드 맥베인의 소설이 할리우드의 전문가 감독에 의해 거의 같은 방식으로 영화화되었어도 이처럼 걸작으로 칭송되었을까요? 구로사와 아키라의 아우라가 공허한 허울이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거장의 이름이 이 영화의 명성에 끼친 영향력도 상당할 겁니다. (04/04/22)

DJUNA

기타등등

[천국과 지옥]이 에드 맥베인의 소설을 각색한 유일한 일본 영화는 아닙니다. 이치가와 곤이 [Lady, Lady, I Did It]을 [Kofuku]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한 적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