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리자 콜로덴코 Lisa Cholodenko

주연
알리 시디....루시 베를리너
Ally Sheedy....Lucy Berliner
라다 미첼....시드
Radha Mitchell....Syd
패트리샤 클락슨....그레타
Patricia Clarkson....Greta
타미 그라임즈....베라
Tammy Grimes....Vera
가브리엘 만....제임스
Gabriel Mann....James
윌리엄 사지....아니
William Sage....Arnie
안 두옹....도미닉
Anh Duong....Dominique
데이빗 손튼....해리
David Thornton....Harry

1.

이번 여성 영화제 상영작 중 가장 '유명했던' 작품들은 패트리샤 로제마의 [밤이 기울면]과 리자 콜로덴코의 [하이 아트]였습니다. 우연이겠지만 모두 미국 배급사가 옥토버인 동성애 소재 영화였지요. [밤이 기울면]이 온전한 모습으로 극장 개봉되기는 좀 어렵겠지만 [하이 아트]는 이미 수입된 영화니까 좀 기다리면 개봉될 겁니다.

[하이 하트]의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막 [프레임]이라는 사진잡지의 부편집장으로 승진한 시드는 우연히 위층에 사는 루시 베를리너가 왕년에 날리던 사진작가라는 걸 알게 됩니다. 시드는 루시를 [프레임]에 소개하고 [프레임]은 루시에게 새 커버 스토리를 의뢰합니다. 루시를 담당하게 된 시드는 점점 루시의 세계에 빠져들고요.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생각외로 정리하기는 힘이 듭니다. 그건 리자 콜로덴코의 각본이 묘하게 형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주기만 할 뿐 악센트를 넣어 모양을 잡아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이 아트]의 줄거리는 모호합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이 영화에 대한 비평가들의 반응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저한테 [하이 아트]는 박제된 로맨스입니다. 시드는 루시와 사랑에 빠지지만 시드의 사랑은 직업적 야심과 얽힐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시드의 가장 개인적인 감정까지도 커리어 무브를 위한 도구로 변하게 되는 거죠. 루시에 대한 시드의 사랑은 콜로덴코 자신이 겪은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는데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첫 영화가 자전적인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이 영화를 다르게 볼 수 있는 방법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고급 예술계의 스노비즘을 비꼬는 영화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특히 시드의 상관인 해리는 노골적인 공격 대상이죠. 특정 뉴욕 예술가 사회 해부도로도 기능합니다. 순수한 캐릭터 스터디로도 영화는 먹힙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영화를 보아도 빈 구석이 남거나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려운' 영화로 인식되는 것이죠.

[하이 아트]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들은 오히려 부분 부분의 요소들입니다. 콜로덴코가 무엇을 의도했건, 인상적인 비주얼로 묘사된 루시와 루시 친구들의 묘사는 정밀하고 기가 막히게 사실적입니다. 시드와 루시, 루시의 애인 그레타의 삼각관계 역시 믿음직하고요. 세 캐릭터 모두 강렬하고 아름다운 개성을 부여받고 있고 그 역학관계를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점점 망가져 가는 루시와 그레타의 관계를 그려내는 콜로덴코의 묘사는 잔인할 정도로 유머스럽지만 그만큼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루시와 시드가 서서히 관계를 쌓아가는 부분의 묘사도 좋습니다. 특히 저는 그들의 첫 베드신이 좋습니다. 쓸데없는 노출없이 캐릭터들의 수줍음과 열정을 이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2.

영화를 가장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입니다. 이 영화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 비평가들도 배우들의 질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과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죠.

가장 눈에 뜨이는 사람은 물론 루시 베를리너를 연기한 알리 시디입니다. [세인스 엘모스 화이어], [위험한 게임]과 같은 영화에서 시디의 건강한 80년대식 외모를 익힌 팬들은 [하이 아트]에서 이 사람이 보여준 초췌한 모습에 기겁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시디의 나이든 모습은 마약 중독자 사진작가라는 캐릭터에 아주 잘 어울릴 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강렬합니다. 그 변신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칼라로 변한 플레전트빌의 시민을 보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외모만 바뀐 게 아니라 훨씬 입체적이고 기술적으로도 세련된 배우가 되어서 돌아온 것이죠.

게다가 루시는 연기할 거리도 많은 역입니다. 외부의 압력과 예술계의 스노비즘에서 탈출했다가 마약중독자로 주저앉은 사진가라는 캐릭터는 그 고정된 상태에서도 매력적이지만 이 캐릭터가 더듬거리며 자신의 삶을 다시 쌓아올리는 과정은 아주 많은 기술 발휘를 요구하지요. 영화 속의 루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시디는 그런 루시를 연기하면서 멋지게 복귀에 성공했습니다.

시드를 연기한 라다 미첼은 [사랑과 그밖의 재앙들]에 이어서 이번에도 동성애자 역을 맡았습니다. 미첼의 친근한 동안은 어딘가 시디가 속해있던 80년대 브랫 팩 패거리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미첼은 90년대의 배우이고 이 사람의 연기도 90년대의 감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미첼은 자신의 순진무구한 외모를 영리하게 이용하면서 시드의 혼란과 성숙을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패트리샤 클락슨이 연기한 한물간 독일인 배우 그레타는 거의 캐리커쳐처럼 보일 정도로 과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상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클락슨이 만들어낸,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연상시키는 걸죽한 허스키 보이스와 넝마 인형과 같은 외모는 묘하게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3.

[하이 아트]는 고급 예술계의 스노비즘을 비판하는 영화로 순수하게 기능하기에는 지나치게 스노비시합니다. 이 영화는 눈에 뜨일 정도로 의식적으로 '쿨'함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뉴욕 타임즈의 자넷 마슬린과 같은 평론가들이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이런 점이죠. '쿨'함에 신경쓰느라 정작 드라마의 깊이가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이 아트]의 모든 장점들이 그 의식적인 '쿨'함에 눌려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의 사실적인 디테일과 연기는 그런 '쿨'함보다 훨씬 강하니까요. (99/04/24)

DJUNA

기타등등

1. 이 영화의 광고 문구인 '야망, 유혹, 희생... 그리고 그 밖의 커리어 무브'는 어딘가 라다 미첼의 호주 시절 영화 제목인 [사랑과 그밖의 재앙들]과 닮아있습니다.

2. [프레임]의 편집장 도미니크를 연기한 사람은 바로 왕년의 패션 모델이었고 요새는 화가로 뛰는 안 두옹입니다. 이 사람은 최근들어 영화에도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데, [하이 아트]의 역은 지금까지 안 두옹이 맡은 역 중 가장 큰 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