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아난드 터커 Anand Tucker

주연
에밀리 왓슨....재클린 뒤 프레
Emily Watson....Jacqueline du Pré
레이첼 그리피스....힐러리 뒤 프레
Rachel Griffiths....Hilary du Pré
제임스 프레인....다니엘 바렌보임
James Frain....Daniel Barenboim
데이빗 모리세이....키퍼
David Morrissey....Kiffer
찰스 댄스....데릭 뒤 프레
Charles Dance....Derek du Pré
실리아 임리....아이리스 뒤 프레
Celia Imrie....Iris Pré
루퍼트 펜리-존스....피어스
Rupert Penry-Jones....Piers
빌 패터슨....첼로 교사
Bill Paterson....Cello Teacher
오리올 에반스....어린 재키
Auriol Evans....Young Jackie
킬리 플랜더즈....어린 힐러리
Keeley Flanders....Young Hilary

듀나 클래식 음악에서도 종종 연주자들의 이미지가 강하게 음악에 각인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차이코프스키 6번 교향곡을 들으면서 이 작달막한 아저씨가 눈을 지그시 감고 지휘봉을 휘둘러대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마르타 아르게리히의 쇼팽을 들으면서 이 아줌마가 처녀 귀신처럼 긴 머리칼을 휘둘러대며 건반을 두들기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기는 힘듭니다. 네, 그리고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들으면서 재클린 뒤 프레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첼리스트가 연주한 것이어도요.

재클린 뒤 프레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서, 사실 전 에밀리 왓슨이 이 영화에서 재클린 뒤 프레로 나왔을 때 조금 어색했습니다. 왓슨은 제가 아는 뒤 프레와는 별로 닮지 않았고 또 일부러 닮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것 같으니까요.

파프리카 이 영화에 나오는 재클린 뒤 프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재클린 뒤 프레와는 전혀 다르죠. 우리가 알고 있는 뒤 프레는 소녀 같이 환한 미소를 잔뜩 머금은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이었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재클린은 심술궂고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천재입니다. 그 때문에 로스트로포비치와 같은 뒤 프레의 친구들이 영화의 묘사에 항의하지 않았던가요?

듀나 사실 저도 재클린 뒤 프레가 이 영화에 나온 것과 같은 사람이었다고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뒤 프레의 동료들과 친구들이 이 사람을 전혀 몰랐다고 할 수는 없죠.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가족들만 알고 있을 그 사람의 다른 모습 또한 있었을 겁니다. 이 영화에서는 시선이 가족들의 눈에 고정되어 있어요. 그 때문에 뒤 프레의 캐릭터가 조금 평면적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

파프리카 저 역시 재클린 뒤 프레가 에밀리 왓슨이 연기한 그런 사람이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힐러리와 재키]가 나쁜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재클린 뒤 프레라는 자연인을 그대로 살려내는 데 백 퍼센트 성공하지 않았다고 해도 영화는 자신만의 진실성을 확보하고 있거든요. 실러의 발렌슈타인이 진짜 발렌슈타인과 닮지 않았을 수도 있고,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가 진짜 헨리 5세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작품들이 무의미하거나 사기인 것은 아니지 않겠어요?

영화 소개를 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이 영화는 재클린의 언니 힐러리와 동생 피어스가 같이 쓴 회고록인 [A Genius in the Family]을 원작으로 삼고 있습니다.

영화는 어린 시절 힐러리와 재키의 모습에서 시작합니다. 힐러리와 재키는 모두 앞날이 창창한 플루티스트와 첼리스트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재키의 재능이 힐러리를 앞지르자 힐러리는 재키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게 되죠. 그래도 여전히 친한 자매는 언제나 줄로 묶은 것처럼 같이 다니는데, 이들의 관계는 첼리스트로 성공한 재키가 이탈리아에서 잠든 언니를 침대에 남겨두고 베를린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면서 일단 끝이 납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힐러리의 시점으로 시작합니다. 힐러리는 키퍼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한 뒤 시골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재키는 당연히 바렌보임과 결혼한 뒤 연주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요. 그런데 갑자기 재키가 모든 연주 스케줄을 때려치우고 힐러리의 집으로 들어와서는 엉뚱하게도 언니 남편인 키퍼와 성적 관계를 요구하죠. 혼란스러워진 부부는 결국 재키의 요구를 들어주고 맙니다.

세번째 이야기는 재키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어떻게 보면 2부가 제시한 미스터리의 해답이지요. 재키는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끝없는 연주 여행 속에서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결국 다발성 경화증의 무시무시한 손길이 재키를 덮칩니다.

듀나 네, 정말 극단적인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의 재키는 첼로 빼면 남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사적인 애정 생활부터 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악을 통해야만 하는 사람이죠. 재키와 그녀의 다비도프 첼로 사이의 관계는 거의 사도매저스틱하기까지 합니다. 영화 초반에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음악의 기쁨도 중반부에 이르면 거의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나마 남아있던 음악마저도 병으로 잃어버리는 거죠. 이런 비극이 있을까요.

[힐러리와 재키]는 [분홍신]과 비슷한 로맨티시즘으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삶과 예술 사이에서 찢겨져나가는 비극적인 예술가 이야기 말이에요.

영화는 평범한 삶을 택한 힐러리를 또 하나의 축으로 세워 놓으면서 그 대조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덕택에 이야기는 굉장히 이분법적이 되지요. 마치 훌륭한 예술가가 되려면 자신의 삶을 몽땅 포기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파프리카 그런 이분법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결국 드라마 안에서는 상징적인 면이 더 강하니까요. 그리고 이 영화가 진짜로 다루려고 하는 이야기는 삶과 예술 사이의 갈등보다는 평범한 사람과 천재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아닌가 싶어요.

후자여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힐러리와 재키]는 어딘지 모르게 흡혈귀 영화 같아요. 우리의 천재 소녀는 예술을 위해 멋대로 가족들의 삶을 찢어발기고, 그러는 동안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 천재 소녀가 만들어내는 예술을 위해 그 아이를 극단으로 몰고 갑니다. 서로가 서로의 피를 빨고 있는 거예요.

듀나 꼭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힐러리와 재키의 복잡한 갈등이 상당히 흥미로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으로 복잡할 거예요. 재키의 비극적 삶을 바라보는 힐러리의 시점에는 은근히 강한 질시가 숨어 있습니다. 아무리 힐러리가 평범한 시골 생활을 옹호해도, 맘 속으로는 사라진 플루티스트의 꿈 때문에 많이 갈등했을 거예요.

파프리카 에밀리 왓슨은 우리가 전에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보았던 그 장려한 멜로드라마를 보여줍니다. 왓슨이 묘사한 재키의 붕괴는 너무나도 드라마틱해서 마치 19세기 오페라를 보는 기분입니다. 여기엔 첼로 연주 장면의 완벽한 재현과 다발성 경화증의 끔찍한 증상 묘사와 같은 뛰어난 테크닉 과시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이 배우의 핏속에 흐르는 격렬한 로맨시티즘에 더욱 의존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레이첼 그리피스는 그에 비하면 조용하고 현실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왓슨보다 더 어려운 역을 한 것이죠. 왓슨의 과시적이기까지한 화려한 연기 속에서 그리피스가 기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사람의 존재감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입니다. 다소 적응하기 힘든 재키의 캐릭터에 우리가 그만큼이나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힐러리 역의 그리피스가 그만큼 훌륭하게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고요.

듀나 왓슨과 그리피스의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독주자와 반주자의 관계와 닮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화도 3악장의 협주곡이나 소나타를 닮았어요. 영화가 그런 형식적인 외양만큼 음악가의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파프리카 [힐러리와 재키]는 결국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죠. 클래식 예술가들을 내세운 소프 오페라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래도 굉장히 강렬한 소프 오페라예요. 재클린 뒤 프레의 짧고 비극적인 삶 때문일 수도 있겠고, 왓슨과 그리피스의 피터지는 연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쉽게 잊을 수 없는 영화인 건 사실입니다.

듀나 그건 그래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죽어가는 왓슨의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고 난 뒤에도 제가 원래부터 맘 속에 품고 있던 재클린 뒤 프레의 이미지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는 거죠. 에밀리 왓슨의 재클린 뒤 프레를 잊는 건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재클린 뒤 프레하면 떠오르는 건 우리가 이미 익숙해진 바로 그 모습입니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돼요.

파프리카 갑자기 엘가의 첼로 협주곡에 대한 갈증이 돌기 시작하네요.

듀나 불쌍한 엘가 첼로 협주곡... 이 작품도 재클린 뒤 프레의 볼모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 요새는 도대체 그냥 순수한 음악으로 들을 수가 없으니 말이에요. (01/03/13)

D&P

기타등등

왓슨은 실제로 첼로 연주 경력이 있고 덕택에 첼리스트 역에 적응이 빨랐다고 하더군요. 영화 때문에 다시 재미를 붙였는지 새로 첼로를 살 생각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 있어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