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민용

주연
정선경....윤희
하유미....정희
손숙....경숙
이진선....기순
송옥숙....영희 엄마
김보연....은주 엄마
황미선....석이 엄마
임희숙....포항댁
김알음....유미
정보석....기동대장
이경영....덕배
김민종....달수

1.

뒷일 감당할 생각 따위는 잊고 한 번 신나게 깽판치고 싶을 때가 있죠. [개같은 날의 오후]가 바로 그런 깽판치는 영화입니다. 대책없고 신나는 난장판. 그래서 영화는 마치 축제처럼 보입니다. 영화는 떠들고 부술 때에 가장 흥겹고,조금이라도 생각을 정리하려고 멈추어 서기만 하면 늘어지기 시작합니다.

2.

[개같은 날의 오후]는 페미니즘 영화일까? 감독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거야 그 사람 생각이지요.

페미니즘 영화라고 불러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안은 주어지지 않고 현실 인식이 얇고 도식적이며 그렇게 진지한 영화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 영화의 스토리 자체가 나름대로 페미니즘적인 결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이 뭐라고 하거나요.

3.

아까도 말했지만 [개같은 날의 오후]는 결코 깊이 있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별 생각없이 간단히 이분되어 있으며 상황도 극단적이고 단순하게 처리됩니다.

깊이 따지려고만 한다면, 여기에 대해 할 말이 꽤 많겠지요. 사실 이런 단순화는 오히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미묘한 억압 구조를 무시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점도 있습니다. 일단 대립구조가 단순해졌기 때문에 영화가 그런 유쾌한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겠죠. 옥상 위의 주인공들만 열 명이나 되니 그 사람들만 다루어도 골치 아파지는데, 다 풀리지도 않을 매듭들을 꼭 만들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소재의 중요성과 미묘함을 제작진들이 더 잘 인식하고 있었다면, 너무나 평면적이며 교과서적이어서 지루한 의무감까지 느껴지는 영화 속의 캐치프레이즈들이 생명력을 획득했을 겁니다.

4.

[개같은 날의 오후]는 좋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습니다만 장점 또한 꽤 많습니다.

우선, 이 작품은 억지 개그가 아닌, 상황과 인물설정으로 시작하는 정공법을 취한 코미디입니다. 지금이 코미디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코미디 영화의 상당수가 기본기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 아닙니까? 적어도 [개같은 날의 오후]는 잔재주 없이 성실하게 앞으로 돌진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극적인 구조만 따진다면 앞부분은 상당히 뛰어납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모자이크 식으로 짜 맞추어가면서 그 와중 속에서도 복선들을 끌어모으는 여유는 본받을 만합니다. 앞부분에서 열심히 저축해두지 않았다면 뒷부분은 상당히 밋밋해졌을 겁니다. 복잡해보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기본 구조는 앞부분에서 전등들을 주워 담고 뒷부분에 그것들을 하나씩 깨뜨리는 식에 불과하니까요.

일어난 사건들이 우발적이고 등장인물들이 별로 '의식화'되어 있지 않은 점도 영화를 자연스럽게 만듭니다. 엉뚱한 할머니의 자살을 결합해서 사건이 부풀어가고 그 때문에 그들이 매스컴에 의해 인스턴트 영웅이 되는 부분도 그럴 듯해요.

그러나, 지적할 단점 역시 많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뒷부분에서는 다소 힘이 딸립니다. 인물 간의 화학적 반응이랄까 하는 것이 부족해서 그럴 지도 모르겠어요. 마무리도 분명하게 매듭지어져 있지 않고 한국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 지적하게 되는 어색한 문어체의 대사들이 가끔 거슬리기도 합니다.

5.

정말 등장하는 사람들이 많죠! 특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 사람들 모두에게 포커스가 돌아갑니다. 부담이 없어서 인지, 신이 나서인지, 욕쟁이 호스티스 윤희역의 정선경부터, 맹한 부녀회장 은주 엄마역의 김보연까지 모두 시원스럽고 즐거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단지 이 사건의 발화점인 정희역의 하유미와 경숙역의 손숙은 좀 재미가 없습니다. 배우탓이라기보다는 인물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정희는 피해자라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경숙은 정말로 문제가 많아요. 그녀는 '옥상의 10인'의 브레인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므로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나오는 대사들은 책을 낭독하는 것 같고 성격은 끝까지 맥이 빠져 있습니다. 가장 나쁜 점은 그녀가 옥상의 축제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축제적 성격에 있으니까요.

김알음이 연기한 유미의 캐릭터에도 시나리오 상에서 진지한 이해가 따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들은 트랜스젠더를 동성애 문화의 전부처럼 여기는 태도에 대해 불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트랜스잰더에 대한 갑작스러운 흥미의 증가가 그들을 또다른 상품화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미라는 등장인물이 이 영화에 흥미로운 비틀림을 제공해주었다는 점은 인정해야겠지요.

이경영과 김민종이 연기한 덕배와 달수는 재미있는 캐릭터들이기는 하지만 스토리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아주 무관한 캐릭터들은 아닙니다. 그들의 대립은 묘하게도 이 영화의 작은 거울과도 같은 면을 지니고 있고 나중에 옥상을 점거하려는 목포의 행동을 제압하는 역할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옥상과 직접 관계는 없으며 목포 또한 양념에 불과한 인물이라, 아무래도 잘 섞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동대장역의 정보석은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에게는 진지한 역보다는 오히려 이런 캐리커쳐가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6.

이 영화의 음악은 정말 문제가 있습니다. 이영훈은 그다지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는지, 다소 진지해진다 싶으면 감상적인 음악을 보내고 급해진다 싶으면 빠른 음악을 내보내는 것만으로 일을 끝내려 합니다. 그러나 음악의 대부분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합니다. 빠른 장면에서는 음악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진지한 장면에 나오는 신파조의 음악은 짜증만 유발할 뿐이니까요.

7.

[개같은 날의 오후]는 신나고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진지한 문제제기를 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긍정적이고, 페미니즘 영화를 의식하지 않고 만들었다고 하지만 자칭 페미니즘 영화였던 [나는 소망한다 어쩌구...] 따위에서 보이는 구역질나는 타협도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이 애국적인 행동으로 여겨지지 않을 날이 언젠가 왔으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합니다. 이런 영화가 계속 만들어진다면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음악과 녹음(가끔 대사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현상의 미비점은 빨리 어떻게 해야겠어요.

이민용 감독은 첫 영화로 무난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에게는 짊어질 부담이 더 커진 셈입니다. (95/09/24)

D&P

기타등등

5년 전에 쓴 글이라는 걸 잊지 마시길.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동성애 문화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해는 꽤 나아졌습니다. 이건 [그것이 알고 싶다] 사람들이 트랜스잰더들을 신나게 쫓아다니던 무렵 쓴 글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