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장예모 Yimou Zhang

주연
금성무....진
Takeshi Kaneshiro....Jin
유덕화....리우
Andy Lau....Leo
장쯔이....메이
Ziyi Zhang....Mei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메이와 진

장예모의 전작 [영웅]이 그랬던 것처럼 [연인]도 작은 영화입니다. 설정만 보면 당나라 말기의 관군과 비밀 결사 비도문의 대결전을 그릴 것만 같지만, 영화는 어느 쪽이 이기건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영화가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이 전쟁 직전의 상황에 말려든 세 사람들의 삼각 관계죠. 나머지는 배경에 불과합니다.

영화는 열흘 만에 비도문의 새 두목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두 관리인 리우와 진이 비도문 전 두목의 딸이라는 장님 무희 메이를 체포하면서 시작됩니다. 리우와 진은 메이를 풀어주어 비도문의 아지트를 급습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메이를 감옥에서 탈출시킵니다. 메이와 함께 비도문의 아지트로 달아나는 동안 진은 점점 메이에게 사랑을 느끼죠.

괜찮은 설정이죠? 영화는 정말 이 설정이 이어지는 동안은 괜찮습니다. 처음엔 생각없이 여자 주인공을 욕보이려고까지 했던 재수없는 바람둥이가 임무를 핑계대며 연기를 하다가 정말로 그 여자 주인공에게 깊이 빠져든다는 설정은 정갈하지는 않아도 그럴싸한 연애담의 근거가 되어줍니다. 장님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무공을 과시하는 비밀 조직의 일원이라는 여자 주인공의 설정 역시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어서 관객들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만 하죠.

그러나 이 괜찮을 수도 있었던 이야기는 중반의 반전과 함께 그만 틀어져버립니다. 반전이 뭐냐고요? 사실 메이는 두목의 딸도 아니었고 장님도 아니었어요. 관군을 아지트로 끌어오는 임무를 맡은 비도문의 스파이였지요. 그게 끝이냐고요? 아뇨. 더 있습니다. 진의 동료 리우도 사실은 비도문이 관군에 심은 첩자였고 십여년 전부터 메이를 사랑하고 있었답니다. 아시겠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연인]/[십면매복]/[비도문]이라는 제목으로 알고 봤던 이 영화의 진짜 제목은 [무간도 4]였던 것입니다! (영화가 개봉되면 정말 모두가 이 농담을 해대겠지요.)

이 반전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이 반전을 통해 엉겁결에 임무의 대상과 사랑에 빠진 바람둥이의 이야기가 몇 년부터 한 여인을 묵묵히 사랑하던 남자와 3일 동안 여자와 사랑에 빠져버린 남자, 그리고 그 사이에 끼인 여자의 폭력적인 삼각관계로 전환되거든요. 여전히 사랑에 빠진 바람둥이 남자의 이야기를 끌어가면서요.

하지만 영화의 최종 결과는 원래의 의도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합니다. 관객들이 자꾸 [무간도]의 설정을 연상하는 건 상관없어요. 두 이야기가 닮을 수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이 이야기가 중간까지 설득력 있게 끌어왔던 감정을 날려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그걸 다시 담으려고 기를 쓰는 동안 이야기는 점점 더 망가져 가고요.

가장 큰 문제는 이 영화의 각본에서 치밀함은 약에 쓰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각본이 꼭 치밀한 구성을 과시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연인]은 그런 치밀함을 요구하는 영화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중간 중간에 캐릭터들이 가면을 벗고 다른 정체를 드러내는 설정이라면 그 변신이 자연스럽게 느껴질만큼 복선과 명확한 심리묘사를 깔아야겠지요. 하지만 이 영화엔 그런 게 전무합니다. 그 때문에 진상이 밝혀지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죠. 배반당했다는 느낌도 들고요. 예를 들어 관객들은 초반에 장님인 메이에게 감정이입하며 주변에 들리는 작은 음향 효과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쓸 겁니다. 하지만 메이가 장님이 아니라면 왜 그 고생을 해야하냐고요? 한동안 "눈먼 아이가 고생하는구나, 어쩜 좋아..."를 중얼거리며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정말 미인계에 넘어갔다는 느낌을 받을 거예요. 차라리 그 속은 느낌이 주제라면 상관없는데 영화는 여전히 로맨스로 흘러가니 맥이 풀릴 수밖에 없고요.

앞뒤도 맞지 않습니다. 도대체 메이의 임무는 뭐랍니까? 삼일 동안 고생해서 한 일이라고는 결전 직전에 자기 아지트에 관군을 불러들인 것밖에 없거든요. 메이와 리우가 아는 사이였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이 벌였던 초반의 난투극은 또 뭐랍니까? 메소드 연기인가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장예모는 선이 굵고 강렬한 멜로드라마의 거장입니다. 그렇다면 무협이라는 장르는 그에게 완벽한 그릇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장예모는 양탄자처럼 앞에 깔린 그 이점을 무시하고 자기가 잘 하지도 못하는 서술 형식 비틀기 게임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능성 있는 멜로드라마를 다 날려버리면서요. 장예모는 반전 이후 끝까지 부서진 멜로드라마를 다 주워담지 못합니다.

그는 무협이라는 장르를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합니다. 그의 액션은 여전히 장르와 아주 자연스럽게 융화되지 못해요. 심지어 스타일없는 감독이라는 이안이 만든 [와호장룡]도 이보다는 훨씬 성공적이었는데요. 그리고 도대체 왜 이 사람은 날아가는 3D 오브젝트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랍니까?

그러나 이 노골적인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전 여전히 이 영화에 관대해지려고 노력합니다. 왜냐고요? 예쁘거든요. 배우들도 예쁘고 입고 있는 옷들도 예쁘고 상당부분을 우크라이나에서 찍었다는 배경도 예쁘고요. 아까 어색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대나무 숲에서 관군과 두 주인공이 벌이는 결전처럼 인상적인 장면들도 많습니다. 노골적으로 [비도문]이라는 제목을 달자 날아다니는 3D 오브젝트들도 나름대로의 생동감을 얻었고요.

배우들의 연기도 괜찮습니다. 유덕화와 금성무, 장쯔이는 모두 자기의 이미지와 명성에 맞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지요. 이 중 가장 안정되고 다채로운 연기를 보여주는 건 장쯔이입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이겠지요. 어려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은근히 고전 연기의 기본기가 된 배우이기 때문도 하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액션'은 장쯔이의 춤이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제작 과정의 문제점들도 이해해주려고 합니다. 비도문의 두목을 연기할 예정이었던 매염방이 사망하는 통에 이 캐릭터의 비중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꽃발 날리는 장면을 찍으려 벌판에 일년 전부터 꽃을 심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사스 때문에 출국이 늦어지는 통에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고 하고요. 막판에 갑자기 눈발이 흩날리는 중국식 뻥도 원래는 의도되었던 장면이 아니라고 해요. 영화 찍을 때 정말로 그렇게 눈이 잔뜩 내려서 어쩔 수 없이 설정인 척 밀어붙인 거라나요.

그러나 아무리 이해를 해주고 관대해지려고 해도, [연인]이라는 영화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많이 날려버린 작품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제가 예쁜 것에 무작정 약한 사람이 아니라면 훨씬 박했겠지요. (04/09/02)

DJUNA

기타등등

이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은 왜 메이를 보면 강간부터 하려고 한답니까? 그게 영 못마땅했는지 비도문 두목이 중간에 한 마디 하기도 하죠. "여자가 원하지 않으면 강요하는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