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로저 코먼 Roger Corman

주연
빈센트 프라이스....로더릭 어셔
Vincent Price....Roderick Usher
머나 파히....마들린 어셔
Myrna Fahey....Madeline Usher
마크 데이먼....필립 윈스롭
Mark Damon....Philip Winthrop
해리 엘러비....브리스톨
Harry Ellerbe....Bristol

마들린의 장례식

[어셔가의 몰락]은 로저 코먼이 AIP와 일하면서 처음으로 만든 '대작'입니다. 지금까지 쥐꼬리만한 제작비로 일주일에 한 편씩 싸구려 영화를 뚝딱뚝딱 만들어왔던 그에게 마침내 그럴싸한 영화를 만들 기회가 찾아온 것이지요. [어셔가의 몰락]의 제작비는 자그만치 20만 달러 (다른 자료에서는 35만 달러라고도 합니다), 촬영 기간은 15일이나 되었습니다! 그것뿐인가요? 시네마스코프에 칼라인데다가 원작은 에드거 앨런 포우의 고전이었지요. 코먼의 예술가적 야심이 꽤 컸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포우의 원작을 충실하게 영화화한 '문학적인' 영화였을까요?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일단 포우의 원작을 충실하게 각색해서 장편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결코 그만큼 긴 각본이 나올 수가 없지요. 장편을 만들려면 새 주인공들을 만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끼워넣어 장수를 채워야 합니다.

코먼을 위해 제임스 매서슨이 쓴 각본은 원작의 나레이터와 아무런 상관 없는 필립 윈스롭이라는 보스턴 청년이 어셔 저택에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친구는 어셔가의 마지막 후손 중 한 명인 마들린과 약혼한 사이죠. 하지만 마들린의 오빠 로더릭은 마들린이 죽어가고 있다면서 필립을 쫓아내려고 합니다. 로더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윈스롭은 마들린을 어셔 저택에서 끌어내려고 하지만 마들린은 갑자기 죽고 저택의 납골당에 매장됩니다. 하지만 마들린이 정말로 죽었을리는 없겠지요?

우울하고 시적이고 컴컴하고 조용한 원작과는 달리 코먼의 영화 버전은 센세이셔널하고 야하고 노골적입니다. 포우보다는 고딕 멜로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지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장중한 옛 저택에서 사악한 방해꾼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야기는 빠르고 수다스러우며 설명도 무지 많습니다. 포우의 시적인 음산함이 끼어들 구석은 거의 없습니다.

당연히 포우의 원작이 가진 고유의 충격도 사라집니다. 공포물로서 [어셔가의 몰락]의 클라이맥스는 무엇인가요? 로더릭이 그 조용하고 차분하게 전개되던 장례식 이후의 일상 속에서 계속 마들린이 납골당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걸 독자들이 알게 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뒤에 나오는 폭력적인 장면들은 그에 비하면 부수적이에요.

코먼의 영화에서 그런 건 나올 구석이 없습니다. 너무나도 설명이 많고 액션이 많은 걸요. 로더릭이 마들린이 살아있었다는 걸 알았다고요? 그거야 관객도 알고, 집사도 알고, 필립 윈스롭도 압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요.

따지고 보면 코먼의 포우 영화들이 포우의 원래 분위기를 살린 적이 있기나 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어셔가의 몰락]만 해도 장 엡스탱의 프랑스 무성 영화 버전이 훨씬 포우의 원작에 가깝습니다. 포우의 원작과 아무 상관도 없는 발 루튼의 [죽음의 섬]도 코먼 버전 영화들보다 포우에 더 가까워요.

그렇다면 코먼이 관객들에게 제공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그 고딕 멜로드라마의 느낌입니다. 포우와는 큰 상관이 없지만 흥미진진하고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종종 지나치게 장황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원래 소스가 되어야 할 원작의 길이가 짧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는 어느 정도 필요악입니다.

그리고 코먼 특유의 그 거창한 공포 영화의 분위기도 잊을 수 없습니다. 코먼은 포우에 충실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의 각색물은 오히려 더 생산적이 되었습니다. 그의 개성이 포우의 이야기와 충돌하면서 전혀 새로운 분위기의 영화가 나왔으니까요. 사방에 거미줄이 깔린 현란한 칼라의 고딕 세트와 사운드 트랙에 섞인 미친 합창단의 신음소리가 식칼을 휘두르듯 관객들을 위협하는 동안 빈센트 프라이스가 장중한 오버 액션으로 기가 막히게 똥폼을 잡고 끝에 가서는 불타 쏟아져내리는 대들보와 함께 모든 게 끝나는 그런 영화 말입니다. 이런 영화를 봤으면서도 제작자가 영화에 괴물이 안나온다고 투덜거렸다니, 나 참.

슬프게도 우리는 이 거창한 코먼의 느낌을 완벽하게 느낄 수 없습니다. 아무리 DVD가 화질이 좋아도, 이런 영화는 싸구려 영화관에서 흥분 잘하는 60년대 호러 영화 관객들과 함께 보아야만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니까요. [어셔가의 몰락]은 어쩔 수 없이 아날로그 시대의 예술입니다. 디지탈로 전환된 DVD로 보면 지나치게 고상하고 세련된 느낌이 들어요. 하긴 이런 게 없었다면 이 영화의 와이드스크린 버전을 보지도 못했을 저 같은 관객들에게 이건 사치스러운 한탄이겠지만요. (01/06/19)

DJUNA

기타등등

이 영화의 원제는 그냥 [House of Usher]입니다. 하지만 요샌 이 제목은 거의 쓰이지 않는 모양이에요. 제가 가지고 있는 DVD도 커버에는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라는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쓰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