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장윤현

주연
송혜교....황진이
유지태....놈이
류승룡....희열
윤여정....함엄
오태경....과똥이
정유미....이금
예수정....진이모
조승연....벽계수
김응수....화담 서경덕
김부선....장덕

황진이

제가 장윤현의 [황진이]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영화는 당연한 규칙 하나를 위반하고 있어요. 주인공 이름을 타이틀에 올리고 포스터에 얼굴을 심으면 영화는 당연히 그 주인공에 집중해야 합니다. 특히 그 사람이 황진이처럼 특별한 사람인 경우엔 말이죠.

하지만 장윤현의 이 이야기에서 황진이의 비중은 범죄에 가까울 정도로 적습니다.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건 원작자 홍석중이 만들어낸 가공인물 놈이입니다. 황진이의 아버지 집에서 머슴으로 살다가 나중에 화적떼 두목이 된 그는 영화에 따르면 황진이의 유일한 사랑입니다.

물론 우린 황진이의 일생에 대해 그렇게 잘 알지 못합니다. 알고 있는 건 기껏해야 당대 유명인사들과 관련된 몇몇 에피소드들뿐이죠. 맘만 먹으면 충분히 자기 자신만의 황진이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지금까지 나온 황진이 관련 영화들이나 소설들은 모두 내용이 다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규칙은 준수되어야 합니다. 주인공은 황진이여야 하고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작가가 생각한 황진이라는 인물이 왜 그렇게 특별하고 매력적인지를 증명해야 한다는 거죠.

그놈의 놈이 때문에 [황진이]는 그게 안 됩니다. 황진이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놈이에게 종속되어 있어요. 놈이 때문에 기생이 되었고 놈이 만을 사랑하고 놈이 때문에 재수없는 사또와 동침하고 놈이 때문에 또 속세를 떠나고... 뭐 그렇습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황진이 자신의 의지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황진이의 가장 큰 존재 목적은 놈이를 사랑하는 것이니 말이죠, 젠장. 진짜 황진이가 이 영화를 봤다면 무덤 속에서 배를 잡고 웃었을 겁니다.

놈이가 조금이라도 매력적인 인물이었다면 전 그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쓸만한 캐릭터처럼 보였던 건 황진이가 기생이 되었을 때까지입니다. 화적떼 두목이 된 뒤로 그는 더 이상 온전한 캐릭터도 아닙니다. 뻔한 의적 스테레오 타입이죠. 막판에 백성들을 이끌고 이름없는 섬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고 헛소리를 늘어놓을 때는 기가 찹니다. 자기가 무슨 모셉니까? 예숩니까? 아니면 경애로운 수령동집니까?

장윤현과 유지태가 놈이를 그리는 방식은 그냥 재수없습니다. 너무 번지르르해요. 거의 [거침없이 하이킥]의 정일우 수준이에요. 살아 숨쉬는 인간은 없고 정의로운 척하는 태도와 왕자병만 남았습니다. 사실 초반 등장 장면부터 재수없습니다. 아니, [황진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놈이의 일당백 액션 장면으로 시작하는 게 말이 됩니까? 전 의적 이야기를 보려면 [홍길동전]이나 [임꺽정]을 봅니다. [황진이]라는 제목의 영화라면 중요시해야 할 건 따로 있지요. 도대체 놈이는 남의 파티에 들어와 뭐 하는 거랍니까?

그럼 황진이 이야기 중 남은 것은? 유명한 유언, 상사병에 걸려 죽은 남자를 위로하는 시, 벽계수, 서경덕 정도가 남았습니다. 벽계수와 서경덕의 이야기는 전체적인 스토리에서 벗어나 어색한 에피소드로 떨어져 있고요. 캐릭터 황진이는 이 영화에서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놈이를 따라다니는 일밖엔.

그래도 얼마 안 되는 남은 부분에서 송혜교는 열심히 하고 결과도 좋은 편입니다. 송혜교의 황진이는 차갑고 쿨하며 자신감에 차 있는 젊은 직업 여성입니다. 송혜교가 영화 내내 유지하고 있는 차분한 무표정함은 매력적이고 무척 예쁘기도 합니다. 가끔 그 무표정함이 깨질 때도 효과가 좋고요. 차라리 이 이미지를 살린 새로운 각본으로 [황진이]를 만들었다면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놈이 이야기는 그 일관된 이미지도 살리지 못합니다. 물론 캐릭터 발전도 없습니다. 배우가 갈 데가 없어요.

모르겠습니다. 홍석중의 원작소설은 영화보다 나을지. 아마 낫겠지요. 더 길고 유지태도 장발을 휘날리며 무협 영화 액션은 안 할테니. 하지만 한동안 읽을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고백하자면 영화를 보고 나서 주문하려 했던 걸 취소해버렸습니다. (07/05/23)

DJUNA

기타등등

다소 고증을 위반한 듯한 무채색의 송도 묘사는 설득력 있습니다. 색배치야 감독의 권한이죠. 관객들에게 송도가 세련된 도회지로 보이고 싶다면 그렇게 노력해도 나쁠 건 없죠. [황진이]의 때깔은 좋습니다. 가끔 황진이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 스모키 메이크업과 반짝반짝 핑크색 입술이 필요 이상으로 시선을 잡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