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찬욱

주연
임수정....차영군
정지훈....박일순
오달수....신덕천
이영미....오설미
김춘기....이대평
박준면....왕곱단
김주희....손은영
천성훈....황규석
최희진....최슬기
박병은....김준범

영군

보도자료에서 박찬욱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베토벤의 8번과 샘 페킨파의 [주니어 보너]에 비교하더군요. 무게있는 작품들 사이에 끼어있는 가벼운 소품이라는 거죠. 적어도 그가 영화를 만드는 동안 '소품'이라는 개념을 꾸준히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건 분명합니다. 전 바로 그 때문에 이 영화가 충분히 날아오르지 않았던 게 아닌가 의심합니다. 영화라는 꿈 속에서 날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게를 처음부터 인식해서는 안 되지요. '가볍다'라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정신병원에서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러는 동안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던 그들의 머릿속에서 현실과 광기의 경계가 조금씩 붕괴된다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스토리는 70년대 미국에서 나왔을 법합니다. 미치는 것이 멋있는 일이고 제도권에 대한 근사한 도전이던 때 말이죠. 조금 모순되어 보이지만, 이 영화는 보다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치유의 이야기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영군의 '치유 과정'은 역시 70년대에 유행했던 [Sybil]이나 [I Never Promised You a Rose Garden]와 같은 정통적인 치유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영군을 돕는 일순 자신도 그렇게 정신이 멀쩡한 인간은 아니라 그 치유는 영군을 아사에서 구출하는 것으로 끝나지만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맛이 간' 상태입니다.

영화가 정신병을 다루는 방식은 관습적입니다. 전 박찬욱과 정서경이 숙제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묘사한 신세계 정신병원 환자들의 묘사가 특별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러나 각본가들이 환자들과 정신병원을 묘사하는 방식은 같습니다. 상식과 현실 세계의 규칙에서 해방된 괴짜들이 전시된 박물관인 거죠. 이들의 묘사에 대단한 깊이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관습의 힘이 은근히 강해서 자유로운 유희여야 할 많은 부분이 좀 갑갑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영군과 일순에게는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습니다. 특히 영군은요. 영화는 영군을 시련 속에서 미쳐버린 로맨틱한 주인공으로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원래부터 정신이 그렇게 온전하지 못한 젊은 여성이 바깥 세상에 어떤 감정을 품게 되었고 그것을 어떻게 표출하는지를 그려 보이죠. 영화는 이 캐릭터가 가진 비틀린 세계관을 존중하고 이해하려 합니다. 물론 모양새는 여전히 관습적입니다만, 내용 자체는 관습에 심하게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면에서, 박찬욱은 디지털 매체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의미의 SF는 아니지만, 굉장히 많은 특수효과들이 쓰였고 그들은 신세계 정신병원 환자들이 꾸는 디지털 꿈을 구현하기 위해 동원됩니다. 물론 여기엔 영군이 전투 싸이보그로 변신하는 과정도 포함됩니다. (이걸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없겠죠?)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임수정은 신났습니다. 안 하는 게 없어요. 콩콩거리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며 마당을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전통적인 비극적 여자 주인공으로 변신하고 그러다 또 갑자기 속만 늙은 할머니 목소리로 자판기와 대화를 나누고 그러다가 갑자기 또 전투 싸이보그로 변신해서... 역도 재미있었겠지만 이런 역을 날아갈 듯 즐겁게 소화해내는 배우의 모습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재미있습니다.

임수정에 비하면 정지훈은 보다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지훈보다 경험있는 배우라면 이 캐릭터를 더 다채롭고 흥미롭게 연기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싸이보그 영군이니 말이죠. 전 정지훈이 이 영화의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기존의 박찬욱 영화들보다 조금 흐릿한 영화입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고, 전체적으로 여름날 주말 오후에 방영되는 공중파 재방송처럼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죠. 종이에 쓰면 개념이 명확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 라인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면 좀 약하게 느껴지고요. 그러나 이야기는 여전히 아기자기하고 유쾌하며, 임수정의 연기와 변신은 성공적입니다. 근사한 역할을 맡아 좋아 죽을 지경인 배우의 모습을 따라가기만 해도 즐거운 영화예요. (06/12/01)

DJUNA

기타등등

틀니 하나 끼우는 것으로 사람 인상이 그렇게 확 바뀔 수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군요. 아니, 전에도 알긴 했죠. 하지만 틀니를 낀 임수정의 모습은 여전히 충격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