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왕가위 Wong Kar-wai

주연
장만옥....수 리첸
Maggie Cheung....Su Li-zhen
양조위....초 모완
Tony Leung Chiu Wai....Chow Mo-Wan
레베카 팬....수엔 부인
Rebecca Pan....Mrs. Suen
라이 첸....호 선생
Lai Chen....Mr. Ho

1.

[화양연화]는 중년의 나이에 다가가는 유부남/유부녀의 러브 스토리입니다. 1960년대 홍콩이라는 시대 배경 속에서, 이들은 의무감과 죄의식 속에서 키스 한 번 해보지 못한 애절한 사랑을 하다 헤어집니다. 영화는 이런 이야기에 맞게 조용하고 느리며 고통스러울 정도로 수줍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어보면, 이 영화가 [중경삼림]과 [해피 투게더]를 감독한 남자의 작품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팬들은 걱정 마시길. [화양연화]는 [해피 투게더]만큼이나 왕가위 영화입니다. 스텝 프린팅과 독백은 사라졌지만 이미지를 다루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에는 여전히 그의 개성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화양연화]는 왕가위답지 않은 성숙한 영화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성숙한 왕가위가 만든 영화입니다. 우리는 별 무리없이 이 영화를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 밀어넣고 다른 작품의 연장선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2.

제가 [화양연화]가 성숙한 영화라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캐릭터들을 다루는 방식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왕가위 영화들에서, 관객들은 아무리 영화 속의 캐릭터들이 끔찍한 사정에 빠져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왕가위 주인공들은 모두 그 끔찍함을 조금씩 즐기는 듯 했으니까요. 그들은 늘 도시인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그런 걸 누리는 '쿨'한 사람이라는 걸 결코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실연을 하거나 곤경에 빠지면, 그의 캐릭터들은 잽싸게 그 상황에 맞는 은유부터 찾았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외로운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자기 독백을 들어주고 자신의 쿨함을 예찬하는 관객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리첸과 모완(누가 제발 이 캐릭터들의 한자 이름을 알려주시길 바랍니다)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이들은 왕가위식 캐릭터들이 가진 자의식 따위는 없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심각한 사람들이고 그들이 겪는 고통은 진짜입니다. 그들의 조용한 동작 역시 연출된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관객들은 엑스 레이 없이도 그들이 어제 먹은 국수가닥까지 뚫어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그들의 창조자인 왕가위보다 더 심각하고 깊이있는 사람들입니다. [화양연화]는 다른 왕가위 영화들처럼 필요 이상의 테크닉 과시로 가득 차 있고 이들 중 일부는 종종 치기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왕가위가 이를 통해 캐릭터의 깊이를 더했다고 할 수도 없고 심리묘사에 뭔가 큰 걸 보태주었다고 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리첸과 모완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런 장식적인 아름다움 속에 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만큼이나 올곧은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쉽게 불륜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아니지요. 아마 그들은 길가에 꽁초 하나 버리지 못하는 모범시민일 겁니다. 그만큼이나 쉽게 피해자가 되는 사람들이고요. 진짜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배우자들이지만 그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입니다.

바로 거기서 이 영화의 긴장감이 발생합니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면서도 결코 그런 자신을 용납할 수 없거든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필사적으로 그런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게 이 영화의 진짜 액션입니다.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세 친구]와 전혀 상관 없는 심각한 어투로 '난 절대로 넘어가지 않아!'를 외치며 다짐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이 자기 무장을 하면 할수록 짓지도 않은 죄로 인한 죄의식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어떻게 보면 이게 왕가위가 만든 '연애 영화'의 한계일 수도 있습니다. 연애 영화로 보기엔 지나치게 자신 속에 함몰되어 있으니까요. 리첸과 모완은 둘이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고민할 때 더욱 빛이 납니다.

3.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In the Mood for Love]인데 어떻게 보면 원래 제목보다 더 영화를 잘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화양연화]는 구체적인 연애담보다는 연애의 분위기에 더 치중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진짜 알맹이는 60년대의 분위기를 적절히 살려주는 냇 킹 콜의 삽입곡과 좁다란 골동품 가게처럼 옛 시대의 향수로 가득 한 세트 속을 누비며 느끼는 감각적인 쾌락입니다.

그렇다고 이 감각이 철저하게 표피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모두 갑갑할 정도로 조용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심리를 설명하는 데 이용되니까요. '깊이 있는' 묘사는 아닐지 몰라도 적절하며 종종 폐부를 찌르는 듯한 힘도 있습니다.

장만옥과 양조위는 훌륭합니다. 최고의 연기가 아니라면, 최고의 연기들 중 하나겠죠. 그러나 그들의 연기보다 훌륭한 것은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존재감입니다. 이들이 최소한의 연기만을 선보이며 카메라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영화는 힘을 얻습니다.

대부분의 왕가위 팬들은 [화양연화]를 그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더더욱 아닐 거고요. 하지만 제가 그들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중경삼림]이나 [아비정전]이 더 왕가위 같은 영화일지는 몰라도, 전 이 영화의 단아함과 [밀회] 풍의 격렬한 연애에 더 끌립니다. 적어도 [화양연화]는 저의 취향에 가장 맞는 왕가위 영화입니다. (00/10/26)

DJUNA

기타등등

1. 이 영화의 자막 번역가는 자의적 번역으로 유명한 조상구였죠. 영어라면 어떻게 커버할 수 있겠는데, 과연 이 양반이 대본을 어떻게 뜯어고쳤는지는 도대체 알 수가 없군요. 게다가 영어 중역이라는 것도 거슬려요. 우리나라에 중국어 번역가가 그렇게 적었던가요?

2. 사과님이 위의 질문에 답변을 주셨습니다. 모완의 이름은 주모운 周慕雲이고, 리첸의 이름은 소려진 蘇麗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