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장-미셸 루 Jean-Michel Roux

요정 방문객

장 미셸 루의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무대는 아이슬랜드입니다. 유라시아와 미대륙의 지판이 만나고 지진과 화산활동으로 아직도 끊임없이 지형이 변하는 곳이죠. 이런 불안정한 환경 때문인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주 요정이나 난쟁이, 천사와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목격합니다. 아니, 그냥 목격만 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공존하기까지 하죠. 루는 아이슬랜드에 몇 년 동안 머물며 이런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이 작품입니다.

영화의 도입부는 흥미롭습니다. 평범하고 진지해보이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마치 어제 먹은 저녁 메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자긴 요정과 친구라느니, 바위 속에 숨은 요정네 집에서 바나나 주스 비슷한 걸 마셨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으니까요. 이들이 요정들이 사는 장소를 표시한 마을 지도를 만들고, 고속도로를 짓는 공무원들이 가운데 놓여있는 요정의 은거지인 바위 때문에 고민하다 무당들을 불러오는 데까지 이르면 정말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는 유령과 근처 호수에 사는 괴물들, UFO의 초반 파트까지만 해도 꽤 흥미로운 정보들을 전달합니다. 가끔 이 나라의 유명인사들도 등장해요. 세계 최초의 민선 여성 대통령이었던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가 아이슬랜드인들의 이런 경향들에 대해 코멘트를 던지기도 하고 [자연의 아이들]의 감독 프리드릭슨이 UFO 목격자로 나오거든요.

그러나 영화는 그 이상의 에너지나 독창성은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동네 요정들이나 '은거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흥미롭지만, UFO 이후로는 이야기가 너무 뻔해지는 걸요. UFO야 아이슬랜드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지 않겠어요? 하는 이야기들도 텔레비전을 틀기만 해도 나오는 초자연현상 관련 다큐멘터리들에서 하는 이야기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고요.

루의 태도도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루는 분명 이들의 진실성을 적극적으로 회의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인정해요. 이 다큐멘터리에서 중요한 건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드는 아이슬랜드인들의 환상적인 정신상태이지 정말로 요정이나 천사가 존재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왜 이런 현상들이 아이슬랜드에서 그렇게 보편적인지에 대한 깊이있는 탐구는 있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루는 그런 탐구를 하는 대신 프렉탈 우주론 어쩌구하는 말도 안되는 이름을 단 자칭 학자에게서 진부해 빠진 다원 우주에 대한 비유를 듣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아, 이런 이야기들은 정말 지겨워요. 제가 초자연현상에 강한 거부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들이 늘어놓는 가설들이 너무 뻔하고 막연하며 진부하기 때문이죠. 전 좀 다양한 이론들과 참신한 비유들을 듣고 싶습니다. 그게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요.

영화의 비주얼은 아름답습니다. 루는 아이슬랜드의 아름답고 거의 기괴하기까지 한 정경을 잘 잡아내고 있고 인터뷰어들 역시 그 세계 속에 잘 녹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극적인 음악 사용과 편집은 너무 유난을 떠는 것 같아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런 유난 속에서도 영화는 정말 졸려요. 졸린 영화라고 꼭 나쁜 영화인 건 아니지만 요정과 괴물들과 천사들이 부글거리는 영화가 이렇게 나른하기만 하다면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겠지요.

[보이지 않는 세계]는 구체적인 현실 대신 시와 환상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입니다. 의도는 좋죠. 하지만 최종 결과가 흔해빠진 초자연현상 다큐멘터리와 얼마나 다른 건지 모르겠습니다. (04/07/21)

DJUNA

기타등등

장 미셸 루는 전작 [Les Mille merveilles de l'univers]를 들고 부천을 방문한 적 있죠. 그 영화의 내용은 기억도 안 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