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장률 Lu Zhang

주연
윤진서....진서
엄태웅....태웅

진서

원래 [중경]과 [이리]는 한 편의 영화로 기획되었다고 하죠. 이리 대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장률이 일종의 알리바이처럼 세웠던 계획이, 영화의 전반부를 중국에서 만들고 후반부를 익산에서 찍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경]의 계획이 부풀었고 결국 [중경]과 [이리]라는 두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지요. 독립된 영화이긴 하지만 그래도 [중경]부터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캐릭터들에 의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영화의 결말 역시 이 순서대로 봐야 더 잘 먹힐 것 같아요. 저야 일이 생겨서 [중경]을 놓치고 [이리]부터 봤지만요.

영화는 익산에 사는 남매에 대한 이야기에요. 여자주인공 진서는 소위 '동네미친년'으로 알려진 지적장애인인데, 노인정이 있는 건물에서 택시 운전사인 오빠 태웅과 살면서 근처에 있는 중국어 학원에서 잡일을 하고 있지요. 진서의 나이는 서른. 이리 폭발사고가 일어났을 때 엄마 뱃속에 있다가 조산했고 엄마는 아기를 낳는 동안 죽었답니다. 영화는 두 남매와 관련된 짤막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익산이라는 도시의 전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진서가 자기가 사는 집 주변을 뱅뱅 돌면서 동네의 보다 세밀한 그림을 그린다면 태웅은 택시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보다 넓은 공간을 커버하고 있지요.

물론 여기서 중요한 건 진서의 이야기입니다. 진서의 존재는 참... 암담하지요. 탄생 자체가 30년 전 일어났던 대참사의 증거잖아요. 진서는 익산의 시민들이 대충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과거를 상처처럼 달고 다닙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그 상징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라스 폰 트리어의 영화에 나오는 성녀 여자주인공들처럼 진서는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흘리고 다니지만 (끊임없이) 이용당하고 겁탈당합니다. 그나마 오빠 태웅이 보호자로 행세를 하긴 하는데, 이 친구는 분노와 폭력성향이 아주 불건전하게 결합된 젊은이로 오히려 그 때문에 동생의 삶은 더 엉망이 되지요.

그렇다고 이들의 이야기가 아주 암담하기만 한 건 아니에요. 진서의 세계가 천박하고 추악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가 대부분 그렇듯 어둡기만 하지는 않죠. 진서는 태웅보다는 상대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중국어 원어민 교사나 이라크인 불법 노동자, 노인정의 노인들처럼 진서를 아껴주는 사람들도 많지요. 진서 역시 자신을 거대한 상처처럼 보고 있지 않아요. 그렇게 보는 건 오빠 태웅이고, 태웅이 미치도록 불행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영화의 시퀀스들은 에피소드 단위로 분절되어 있고 이들은 모여서 모자이크처럼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됩니다. 개별 에피소드는 성격의 편차가 꽤 큰 편으로 갑작스러운 겁탈 장면처럼 공포스러운 장면도 있고, 중국인 교사와 진서의 관계처럼 따뜻한 장면들도 있으며, 어느 노인정 장면처럼 황당무계하게 웃기는 장면들도 꽤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장률도 맘만 먹으면 코미디를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전 영화의 결말이 정말 좋았답니다. ([중경]을 보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려지는 그림이 학대당하고 겁탈당하는 성녀의 이야기라는 점은 변함이 없고, 몇몇 상징들은 이전처럼 지나치게 노골적이라 초반부터 무슨 계획인지 다 보입니다. 슬슬 조금 다른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08/11/03)

DJUNA

기타등등

배우들 이름이 캐릭터 이름과 같죠. 장률이 이름 짓는 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이라더군요. 하긴 [망종]과 [경계]에서는 주인공들 이름이 같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