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프랑코 제피렐리 Franco Zeffirelli

주연
샤를로트 갱스부르....제인 에어
Charlotte Gainsbourg....Jane Eyre
안나 파퀸....어린 제인 에어
Anna Paquin....Young Jane Eyre
윌리엄 허트....로체스터
William Hurt....Rochester
조안 플로라이트....패어팩스 부인
Joan Plowright....Mrs. Fairfax
제랄딘 채플린....스캐트처드 양
Geraldine Chaplin....Miss Scatcherd
빌리 와이틀로....그레이스 풀
Billie Whitelaw....Grace Pool
마리아 슈나이더....버사
Maria Schneider....Bertha
피오나 쇼....리드 부인
Fiona Shaw....Mrs. Reed
엘 맥퍼슨....블랜치 잉그램
Elle Macpherson....Blanche Ingram
존 우드....브로클허스트 씨
John Wood....Mr. Brocklehurst
아만다 루트....탬플 양
Amanda Root....Miss Temple
사무엘 웨스트....세인트 존 리버스
Samuel West....St. John Rivers
조세핀 세르....아델
Joséphine Serre....Adele

1. 고전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

아무래도 이 시대에 고전을 영화로 만드는 사람들은 일단 한 번 그 이유를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처럼 고전을 영화화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는 때에는 말이죠. 아마도 제인 오스틴은 현대의 깨져가는 가족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동기가 될 지 모릅니다. 에디스 와튼의 세계는 뉴욕의 뒷골목 깡패들의 세계에 대입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일 겁니다. 셰익스피어의 독백은 어느 랩송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현대적일 거고요.

일단 이 고비를 넘어가면 우리는 또 다른 고민과 부딪히게 되는데 그건 바로 '어떻게 만들 것인가'입니다. 아무래도 그냥 막 만들면 왜 만들었냐고 욕을 먹겠지요?

제피렐리의 경우는 어떨까? 우선 그 사람은 첫번째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오페라 연출이 부업인 영화 감독이 아닙니다. 영화를 꽤 잘 만드는 오페라 연출가죠. 그리고 20세기 오페라 연출가들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과거의 작품을 다시 올리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과거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특별한 고민이 필요가 없어요.

두번째는? 제피렐리는 두번째 항목에서까지 안이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각색이 안이한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때까지 한 번도 영화에서 살아난 적이 없었던 생생한 젊음의 활력이 가득한 영화였습니다. 그의 [햄릿]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 영화가 기존의 침침한 [햄릿]과 분명히 구별되는 작품이라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극중극으로 되살린 [말괄량이 길들이기]도 원작의 어설픈 스토리를 보완한 알찬 작품이었고요. 적어도 그는 원작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하는 경우는 없지만 그것들이 낡지 않아보이게 통풍시키는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2. 제인 에어

제피렐리의 [제인 에어]에는 쇼킹한 구석이 하나 있습니다. 이 각색에는 전혀 고딕적인 냄새가 없습니다! [제인 에어]를 다이제스트 판으로 대충 읽은 독자들이라도 손필드 저택이 구질구질한 안개 속에 음산하게 서 있어야 하며 로체스터는 시꺼먼 밤중에 악마처럼 툭 튕겨져 나와야 한다는 사실 쯤은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로체스터의 미친 본부인은 방 구석에서 야수처럼 으르렁거려야하겠지요. 밤중에는 기괴한 웃음 소리가 끝없이 들려야 하고 그레이스 풀이 등장할 때는 뒤에서 조명을 때려 악당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하고요.

제피렐리는 이것들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그리고 어이가 없을 정도로 침착합니다. 로체스터와 제인 에어의 첫만남은 너무나 기분좋은 오후에 이루어집니다. 손필드 저택은 아주 아늑하고 편안해 보여서 정말 그곳에 가서 살고 싶을 정도입니다. 마리아 슈나이더가 연기한 버사는 미치광이치고는 너무나 얌전해서 동정심이 팍팍 들 정도입니다.

이건 분명히 의도적입니다. 제피렐리는 뭔가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건 샤를로트 갱스부르라는 배우의 캐스팅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녀에게는 '제인 에어'라는 캐릭터를 떠올리면 곧장 느낄 수 있는 어떤 강한 면이 모자랍니다. 손필드의 긴 복도를 말없이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에는 원작에서는 느낄 수가 없는 묘한 서글픔과 수줍음이 어려있습니다.

제피렐리는 전형적인 브론테식 분위기를 살리는 대신, 보다 얌전하고 섬세한 심리물을 만들 생각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게 성공한 것일까요?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스토리는 원작에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에, 새 영화의 얌전한 해석은 전체 스토리와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로 바뀐 면들도 원작의 인상이 워낙 강해서 그 아래에 그냥 눌려버립니다.

3. 충실도

[제인 에어]를 보고 원작과 다르다고 투덜거리는 관객들을 보았습니다. 소설을 각색한 영화를 볼 때 원작과의 일치점만 따지는 건 별로 생산적인 태도가 아니지요. 그러나 [제인 에어]만큼 원작이 유명할 경우에는 아무래도 각색의 충실도에 대한 말들이 귀찮은 발찌처럼 따라다닙니다. 게다가 이런 경우, 소설이 자체적인 완결성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색이 원작에서 멀어졌을 때는 원작 만큼의 완성도를 가지지 못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자칫하면 조페의 [주홍 글씨] 따위가 되어 버리죠.

역시 이런 원작을 각색하는 방법은 원작의 기본 플롯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깡그리 무시한 채 독자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를 [제인 에어]를 각색한 가장 훌륭한 영화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당연한 겁니다.

여기까지는 일반론. 그럼 [제인 에어]로 들어갈까요?

제피렐리의 [제인 에어] 분위기는 아까도 말했지만 원작과 상당히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연기 패턴, 연출 스타일에 따른 것이죠. 이것도 오페라 연출과 같은 것입니다. [라보엠]의 무대를 20세기의 뉴욕으로 옮기는 연출을 할 수는 있어도 그 대사를 바꿀 수는 없는 것과 같아요. 대부분 제피렐리 영화의 각본은 원작에 아주 충실합니다. 특히 그의 셰익스피어는 대사 삭제는 있어도 대사를 고치는 일은 없습니다.

[제인 에어]도 원작에 상당히 충실한 편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스토리의 변형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인이 손필드를 떠난 후반부가 아주 압축되었지요. 하지만 예전부터 다들 그랬답니다! 가장 잘 알려진 로버트 스티븐즈의 영화에서는 세인트 존이 등장도 하지 않아요. 제인은 손필드를 한 몇 분인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답니다. 수잔나 요크가 주연한 또 다른 각색에서도 그 장면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이건 원작 자체의 구조에 기인한 것이죠. [제인 에어]는 손필드에서 파국을 하나 겪은 다음 다소 기복없는 세번째 이야기로 이어지다가 다시 손필드로 돌아오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까요. 느릿느릿 이어지는 19세기 성장소설에서 이런 플롯은 별로 이상한 것도 아니고 문제가 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다릅니다. 영화는 보다 압축된 형식을 요구하거든요. 따라서 이 중간 단계를 잘라버려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원작의 원래 무게 자체가 상당한 손상을 입지요. 그럼 어째야 하나? 저희는 모릅니다. 누가 영화화하라고 했나요?

4. 연기

[제인 에어]의 가장 큰 장점은 배우들의 질입니다. 얼핏 보기에 윌리엄 허트와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둘 다 미스 캐스팅처럼 보이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전과 다른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를 연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의 캐릭터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 같은 로맨틱함과 격렬함이 빠져 있는데, 그 대신 그들은 수줍음과 숨겨진 갈망을 조심스럽게 표현함으로써 이를 커버합니다.

이들의 연기가 다소 비정상적이라면 안나 파퀸이 연기한 어린 제인 에어는 정통적이고 단도직입적입니다. 이 역은 그녀가 [피아노]에서 보여 주었던 로맨틱한 연기의 연장선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린 제인 에어의 이미지와 아주 맞아서 파퀸에게 가장 거부감없이 빠져들 수 있습니다. 물론 앞에서도 여러 분들이 지적했던 일관성의 문제가 있긴 합니다. 저희들 역시 안나 파퀸이 자라서 수잔나 요크처럼 되었다고나 해야 믿지,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되었다고 한다면 믿지 않을 겁니다.

이 영화엔 조금 별난 캐스팅이 하나 있습니다. 하이텔에서도 비키니 수영복 사진들이 수십 장은 굴러다닐 것이 분명한 호주 출신 모델 엘르 맥퍼슨이 블랜치 역으로 잠시 등장하지요. 하지만 맥퍼슨의 20세기식 털털한 얼굴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자기 같은 미모여야 할 블랜치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편이 아니더군요. (96/02/27)

D&P

기타등등

역시 유명한 원작을 영화화하는 건 골치 아픈 일입니다. [제인 에어]처럼 슈퍼 베스트셀러일 경우엔 더할 나위도 없죠. 가치 있는 일이 아닐 경우라면 안전한 길을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런 원작을 영화화하는 것이 예술적으로 '안전한 길'이 아님은 당연하겠지요? 그럼 이건 '가치있는 일'일까요? 각자 알아서 생각해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