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최인규

주연
김일해....방성민
문예봉....마리아
진훈....안인규
김신재....명자
이상하....용길
홍은순....안나
곽도식....요한
윤봉춘....권서방

향린원의 고아들

드디어 [집없는 천사]를 보았습니다. 최인규는 해방이후 [자유만세]와 같은 민족주의 영화를 만들어 한국 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지만 사실 일제시대 때는 꽤 많은 어용 영화들을 만들었지요. 그 중 하나인 이 영화가 얼마 전에 발견되어 상영된 겁니다.

[집없는 천사]의 내용은 사실 정치색과는 무관합니다. 실화에 바탕을 둔 감상적이고 계몽적인 사실주의 영화지요. 영화는 명자와 용길이라는 고아 남매를 소개하면서 시작되는데, 용길은 자길 괴롭히는 건달인 권서방으로부터 달아나 친절한 목사인 방성민의 보호 밑에 들어가게 됩니다. 방성민은 처남 안인규의 도움으로 향린원이라는 소년의 집을 만들고 용길은 거기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지요. 그러는 동안 동생을 찾아 헤매던 명자는 친절한 의사를 만나 간호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습니다.

영화는 [자유만세]보다 재미있고 스타일 면에서도 더 안정되어 있습니다. [자유만세]의 주인공 투사 아저씨는 투사라는 것만 빼면 상당히 재수없는 인간이었죠. 하지만 방성민이나 안인규는 훨씬 호감가는 사람들입니다. 멜로드라마는 도가 좀 지나친 구석이 있지만 (사람 때려 잡으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가 갑자기 회개해 눈물을 찔끔거리는 건달들의 묘사나 헤어진 남매를 재회시키는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일치 같은 걸 보세요) 그 어처구니 없는 부분들도 지금은 아주 귀엽습니다. 이런 구닥다리들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하면 [집없는 천사]는 썩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영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매력을 확 날려버립니다. 모든 것이 해결된 종반부에 이르자 고아 한 명이 말없이 걸어나와 일장기를 올리고 사람들은 갑자기 일본어로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것이죠. 그 뒤는 더 웃깁니다. 암기가 끝나면 "다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지?"라는 대사와 함께 장면이 마무리 지어지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지되었던 드라마가 다시 시작되니까요. 하여간 이 장면이 이어지는 동안은 소름이 쫘악 끼칩니다. 자연스럽게 흐르던 인간 드라마가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이고 잔인한 무언가에 의해 갑자기 토막 나는 겁니다. 호러 영화가 따로 없어요.

이 장면만 보고 이 영화를 '친일영화'라고 부르는 건 조금 쑥쓰럽습니다. 이 황국신민서사 장면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드라마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떨어져 있거든요. 논리적으로 따지면 그게 들어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고 심지어 전체적인 톤과도 맞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작정한 친일영화라면 최소한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삽입할 사전준비라도 거쳤겠지요. 이건 그냥 막 넣은 겁니다.

아무리 봐도 최인규는 당시에 살았던 많은 예술가들처럼 타협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그에게 가해졌던 압력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였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요. 아마 이 장면을 찍는 동안 그 자신도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을지도 모르죠. 그가 엄청난 철면피가 아니었다면 민족주의 영화의 걸작(!)인 [자유만세]를 만드는 동안에도 비슷한 수준으로 부끄러웠을 겁니다. (05/03/04)

DJUNA

기타등등

아, 정말 사운드가 형편없더군요. 하긴 그 정도로 남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 영화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다음 상영 때는 자막을 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본어 대사들도 상당히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