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하명중

주연
황보라....지니
김기범....고스트

지니

왜 하명중이 [주문진] 같은 영화를 만들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 전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기자시사회 때 뭐라고 말했던 것 같긴 한데? 젊었을 때는 저항적인 영화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행복한 영화만을 만들고 싶다고 했던가요. 그래요. [땡볕]과 [태]를 저항적인 영화라고 할 수는 있을 겁니다. 적어도 그런 분위기의 영화들이었죠. 하지만 그들이 진짜 저항적인 기능을 할 정도로 메시지가 분명한 작품들이었던 건 아닙니다. 감독작만 따로 뽑는다면 별로 길지 않은 필모그래피지만, 그 안에 '이제 저항적인 건 그만하고 사랑 이야기나 하고 싶어!'라고 외칠 정도로 '저항적인' 영화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정말 그렇다고 쳐도 그게 [주문진]이라는 영화의 존재에 대한 어떤 변명도 될 수는 없습니다.

영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렇게 상상해보죠. 귀여니가 쓰지 않은 귀여니 풍의 가상 소설을 남기남이 영화했다고 말입니다. 분위기가 잡힐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여러분은 몇 가지를 제외해야 합니다. 이 영화에는 남기남 특유의 막가파 정신도 없고, 유치하고 조잡하더라도 한동안 같은 세대 여자애들을 자극했던 공감대 같은 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는 두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는 '재미'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당연하죠. [주문진]은 하명중의 영화이고, 귀여니도, 남기남도 참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기대해야 할 하명중의 개성은 무엇일까요. 모르겠군요. 전 여전히 하명중하면 [땡볕]의 달구지 섹스신으로 대표되는 80년대식 느끼한 에로 분위기가 떠오르는데, 그가 [주문진]에서 그걸 재현할 생각은 없었을 것 같으니 말이죠.

영화는 귀신 이야기입니다. 주문진에 귀신 들린 펜션이 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택시운전사는 한몫 잡기 위해 동생 지니와 함께 그 펜션을 찾습니다. 거기엔 귀신도, 유령도 아닌 '고스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긴 머리 남자가 살고 있는데, 지니는 그 남자에게 반합니다. '고스트'는 오래 전에 죽은 연인의 기억에 사로잡혀 그 펜션에 살고 있는데, 영화는 이 초자연적인 이야기에서 그의 위치가 어디 쯤 되는지, 왜 그 펜션이 그런 소동의 무대가 되었는지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할 의도는 없어보입니다. 그렇다고 난해하거나 어려운 영화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설명하기 귀찮아하는 게 눈에 보인다는 거죠.

[주문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구제불능의 촌스러움입니다. HD 디지털 영화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그런 티가 더 분명한 것일 수도 있겠죠. 전 HD 화면이 이렇게 70년대식으로 촌스러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감수성과 매체가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오히려 신기해요. 7,80년대 영화의 감수성이 20여년 동안 매장되었다가 아무런 발전이나 성숙없이 갑자기 좀비처럼 되살아나 어그적어그적 걸어다니고 있는 걸 상상해보세요. 이쯤해서 전 하명중이 '고스트'라는 남자주인공을 선택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연기 지도와 대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 황보라가 재능과 가능성 모두를 갖춘 좋은 배우라고 믿기 때문에 [주문진]에서 이 사람이 보여주는 경직되고 과장된 영구식 연기 때문에 영화 내내 고통받았다는 말을 하기가 싫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쩝니까. '고스트' 역의 김기범 역시 연기하기가 그리 즐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의 대사나 역할은 70년대 성우 아저씨들이 읊어야 어울릴 정도로 시대착오적이고 어이가 없습니다. 장근석처럼 능글맞은 배우라면 차라리 포기하고 그걸 일종의 키치적 유희로 삼았을 수도 있겠지만 김기범은 그런 여유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배우 탓은 못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연기에는 부인하기 불가능한 일관성이 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감독의 영향입니다.

[주문진]은 괜찮은 오락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따라붙습니다. 관객들이 전투적이 되어 이 작품을 박살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이 영화는, 5,60년대 미국 컬트 영화들이 그렇듯, 즐거운 제의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지겹고 어이없는 헛소리의 다발에 불과합니다. 단지 전 김기범 이름 하나만 믿고 극장을 찾을 엘프들에게 이 영화가 어떻게 보일지는 판단하지 못하겠습니다. 팬심이란 신비스러운 것이라 이성이나 심미안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10/01/15)

DJUNA

기타등등

그러고보니 황보라와 김기범은 모두 [레인보우 로망스] 동창생들이군요. 아무도 기억 못하는 시리즈지만 그 때의 연기가 지금보다는 다들 나았던 것 같습니다. 더 재미있기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