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도리스 되리 Doris Dörrie

주연
마리아 슈라더....파니 핑크
Maria Schrader....Fanny Fink
피에르 사노시-블리스....오르페오 드 알타마르
Pierre Sanoussi-Bliss....Orfeo de Altamar
미하엘 폰 오이....로타르 스티커
Michael von Au....Lothar Sticker
엘리사베트 트리세나르....마델라이네
Elisabeth Trissenaar....Madeleine
잉고 노이욕스....라세 랑스펠트
Ingo Naujoks....Lasse Laengsfeld
요아킴 크뢸....안톤
Joachim Król.... Anton
페기 파르나스....라데브레이트 부인
Peggy Parnass....Frau Radebrecht
로로세 켈러....자자
Lorose Keller....Zsa Zsa
아냐 호프만....샬로테
Anya Hoffmann....Charlotte

1. 파니 핑크

눈이 큰 사람들은 일단 보기에도 불쌍해 보입니다. 커다란 눈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나 속을 노출시키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이 영화에서 파니 핑크를 연기한 마리아 슈라더도 바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눈과 끝이 촉 처진 입 때문에 그녀는 정말 처량해 보입니다. 그런 그녀가 영화에 등장해서 맨 처음 하는 고백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이 영화의 원제이기도 하죠)'라니, 정말 딱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어요.

파니 핑크는 불쌍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오르페오 드 알타마르도 극중에서 말했지만, 왜 그렇게 불만이냐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직장도 있고 집도 있고 외모도 나쁘지 않은 백인 여자인데. 그러나 파니의 삶은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고 그녀는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합니다. 따지고 보면,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이나 자신을 사랑해 줄 남자를 찾으려는 시도도 모두 이런 공허함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의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어요. 민감하지만 상상력이 그 민감함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취하는 행동이지요.

도리스 되리는 감독/각본가라는 신적인 지위를 이용해서, 파니에게는 부족한 상상력의 산물을 영화 전체에 뿌려 그녀를 구원합니다. 23번을 등에 단 남자 라세의 등장만이 구원이 아닙니다. 파니에게 진정한 구원의 순간은 오히려 그녀가 고장난 엘리베이터에서 굿을 할 때, 오르페오의 등에 '이히 루베(오르페오가 리베를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디히'라고 쓸 때, 샬로테의 딸과 오르페오와 함께 아파트가 무너져라 쿵쿵거리며 춤을 출 때 찾아옵니다. 그녀가 죽음의 강박 관념과 갇혀있다는 느낌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일상의 감옥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타르에 대한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짝사랑도 오르페오의 주술이 결합하면서 구원의 과정이 됩니다.

[파니 핑크]는 무의식적으로 예술(가)에 의한 삶의 구원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르페오는 정말로 파니를 구했으니까요. 그가 정말로 외계인들을 따라 악트루스로 갔건, 파니가 준 아르마니 양복과 골드 바를 들고 어디론가 내뺐건 간에요.

2. 쾰른

이 영화 속의 쾰른은 참으로 냉담하고 공허한 도시로 묘사됩니다. 건조하고 차가운 쾰른 공항, 낙서투성이의 지저분한 거리, 엔트로피의 극한에 도달한 것 같은 파니의 아파트. 어딘지 모르게 인구가 모자라는 [블레이드 런너]의 LA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인간 관계는 점점으로 끊겨있고 그나마 진정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니 우리의 민감한 안테나인 파니가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요.

말해놓고 보니, 파니만 그런 것도 아니네요. 다람쥐 인형을 끌어안고 밤의 어두움을 이기려는 로타르나 남자 애인에게 실연당한 오르페오,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믿는 할머니, 유일한 친구였던 고양이마저 빼앗긴 아줌마... 파니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조리 무언가에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이 황량한 풍경화는 물질적인 풍요만큼 정서적인 만족감을 얻지 못한 (아니면 그나마 가진 것도 상실한) 구미 복지국가 국민들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그래도 되리의 관점은 상당히 낙관적입니다. 집단 퇴거 당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파니의 방에 모여 파티를 벌일 때, 이들은 그래도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인간적 유대감을 얻었음을 알게 됩니다. 역시 해결책은 인간들 사이에서밖에 얻을 수 없나봅니다.

3. 동성애와 페미니즘

요새는 이 두 단어가 진지한 이해없이 남용되는 경향이 있죠. [파니 핑크]를 묘사하는 데에도 두 표현은 끊임없이 사용됩니다. 컬트 페미니즘? 펑크 페미니즘은 또 뭐죠?

그러나, [파니 핑크]는 그 어느 쪽으로 보아도 그렇게 치열하다고 할 수 없고 깊이 있는 주제 파악이 있다고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를 꼭 게이 영화나 페미니즘 영화로 여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 두 장르의 영화들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파니와 오르페오의 사랑,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걷어차는 영화의 결말 등은 이 영화가 과거의 것과는 전혀 다른 지지대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페미니즘과 동성애 운동이 어느 사이엔가 우리 시대 팝 문화 속에 부담없이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저희들은 모르겠군요. 그러나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공정한' 영화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진짜 동성애 영화와 페미니즘 영화가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을 때, 후방에서는 [파니 핑크]같은 영화들이 태어나는 것이겠지요.

4. 재료들

[파니 핑크]의 시각적인 인상은 소박하지만 재미있습니다. 클라우스 코트만과 지그베르트 캄머러가 만들어낸 이 세계를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밤중에 장난감 가게에 몰래 들어가 구경하는 기분입니다. 헬멧처럼 언제나 파니의 머리 위에 머물고 있는 모자들에서부터 오르페오의 커다란 인형까지 아기자기하기 그지 없어요. 이것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주변의 풍경이랑 상황과도 적절하게 어울립니다. 우중충한 쾰른의 시가지를 꽃장식처럼 꾸미는 카니발의 풍경도 한 몫하고요.

헬지 바인들러가 촬영한 푸른 빛이 도는 영상은 영화의 환상적인 면과 우울하고 현실적인 면을 동시에 중의적으로 표현합니다. 아주 교묘해요.

마리아 슈라더는 너무나도 재미있는 배우입니다. 그녀가 재치있게 표현한 파니 핑크는 별나지만 공감할 만하며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가 빠지기 쉬운 감상주의도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피에르 사누시-블리스도 오르페오 역을 유쾌하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니키 라이저의 음악은 저희들의 취향에는 약간 노골적인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몇몇 선곡들은 적절하고 또 어울립니다.

도리스 되리의 각본과 연출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파니 핑크]는 결코 깊이 있는 영화는 아니며 평균적인 인식에서 많이 벗어난 영화도 아닙니다. 그러나 영화는 유머가 풍부하고 재미있으며 과도함이나 부족함이 없이 깔끔합니다. 오래 생각할 거리를 주는 영화는 아니지만 주인공 파니 핑크와 같이 웃고 울면서 두 시간을 보내고 나면 결코 아쉬운 느낌은 들지 않을 겁니다. (95/10/26)

D&P

기타등등

1. 5년 전에 쓴 글이라는 걸 잊지 마시길. 그 동안 우리 관객들도 꽤 교육을 받기는 했지요.

2. 마리아 슈라더는 그 뒤에도 꾸준히 성장했고 꽤 많은 영화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저번에는 [아이메와 야구아]로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