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로버트 헤이머 Robert Hamer

주연
데니스 프라이스....루이 만치니/루이 만치니의 아버지
Dennis Price....Louis Mazzini/his father
발레리 홉슨....이디스
Valerie Hobson....Edith
조운 그린우드....시벨라
Joan Greenwood....Sibella
알렉 기네스....애스코인 대스코인/헨리 대스코인/캐넌 대스코인/대스코인 제독/대스코인 장군/레이디 아가사 대스코인/대스코인 경/에델버트 대스코인
Alec Guinness....Ascoyne d'Ascoyne/Henry d'Ascoyne/Canon d'Ascoyne/Admiral d'Ascoyne//General d'Ascoyne/Lady Agatha d'Ascoyne/Lord d'Ascoyne/Ethelbert d'Ascoyne
오드리 필즈....만치니 부인
Audrey Fildes....Mrs Mazzini
마일즈 맬슨....사형집행관
Miles Malleson....Hangman
클라이브 모튼....형무소장
Clive Morton....Governor
존 펜로즈....라이오넬
John Penrose....Lionel

1.

만치니, 헨리 & 이디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영국인들은 극도로 예의를 중시하고 감정을 억제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나라의 문화가 예의를 중시하고 감정을 억제하게 강요한다고 해서 그게 꼭 그 나라 사람들의 천성적인 성품까지 그렇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화는 강요되는 것이지 사람들과 함께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예의와 절차, 감정 억제를 중시하는 세계에 예술가들을 던져넣으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정말로 체질이 아닌 사람들은 브론테 자매나 앤 래드클리프처럼 광기와 로맨스로 가득찬 광폭한 작품들을 내놓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적응을 잘하는 사람들은 제인 오스틴이나 우드하우스처럼 자신의 감정을 그런 예의와 절차에 녹여낸 얄밉게 세련된 작품들을 내놓겠지요. 다시 말해, 극단적으로 다른 영국 문화의 두 경향은 모두 뿌리가 같습니다. 같은 세계에 대한 다른 반응일 뿐이죠.

여기서 우리가 흥미를 가져야 할 것은 당연히 후자입니다. 감정 자체가 없어진다면 모를까, 이런 식의 감정 억제는 기형적이니까요. 결과적으로 감정과 문화도 비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주변국 사람들이 영국을 괴짜들로 가득한 괴팍한 나라로 여기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2.

전통적인 영국 추리물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어떤 거물이 살해당하면서 시작될 겁니다. 독자들은 매우 영국식으로 괴팍한 탐정을 따라 예절바른 상류사회 사람들로 구성된 용의자들을 누비며 그 점잖은 세계에 숨겨진 탐욕과 욕정의 흔적을 찾아나서겠지요. 추리 소설이 전형적인 영국적 장르라는 게 정말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기엔 우리가 영국식 문화와 그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는 모든 게 있습니다. 엄격한 예절을 통해 절도있게 진행되는 폭력적인 감정의 드라마 말입니다.

[친절한 마음과 화관]도 전형적인 영국 추리물의 얼굴을 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루이 만치니는 가난한 이탈리아 가수와 결혼한 어머니를 박대한 외가 친척들을 한 명씩 살해해 공작 지위를 차지하려는 살인자입니다. 척봐도 설정이 잡히지 않습니까? 살인이라는 피투성이 행위를 다루고 있지만, 여덟 명이라는 사람들을 짧은 러닝타임 안에 다양하게 살해하다보니 어느 순간 희극적인 게임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루이 만치니가 고상한 취향을 가진 우아한 남자이기 때문에 그의 성품 역시 그가 벌이는 게임에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영국이라고 해도 품위있는 예절과 살인의 결합은 어쩔 수 없이 기형적이기 때문에 [친절한 마음과 화관]은 블랙 코미디가 됩니다. 단지 매우 영국적인 블랙 코미디지요. 영국의 계급 사회를 반쯤은 조롱하고 반쯤은 자랑스러워하며 따르는 이런 전통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친절한 마음과 화관]은 그런 스타일을 극으로 밀어붙입니다. 사형 전날에 그가 사형수 감옥에서 쓰는 회상록의 형태를 취한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련되고 우아합니다. 영화의 속도 역시 일어나는 사건의 내용과 상관없이 시계처럼 일정하고요.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만치니의 위트 넘치는 나레이션도 그가 유부녀와 바람을 피울 때건, 살인을 저지를 때건 어조가 똑같습니다. 종종 그는 자기가 저지르는 살인을 서술할 때 각운을 딱딱 맞춘 싯구를 낭송하는 잔인한 장난을 치기도 해요. ("I shot an arrow in the air; she fell to earth in Berkeley Square.")

그러면서도 영화는 은근슬쩍 영국 계급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습니다. 여기에는 장르 고유의 자조 이상이 녹아 있는 듯 해요. 처음에는 복수와 모멸감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서 시작한 만치니의 살인은 그가 피해자들이 속해 있는 사회에 조금씩 진입하는 동안 점점 무감정한 게임이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그와 그의 어머니를 피해자로 만들었던 귀족 세계의 스노비즘과 위선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데 신경 쓰는 관객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우린 별 어려움없이 그에게 감정 이입이 되니까요. 그건 우리가 한니발 렉터에 매료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우리에게 식인은 그리 고상한 행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 간을 솜씨좋게 요리해 품질 좋은 키앙티 포도주와 곁들여 내면 사정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피투성이 살인이라고 해도 만치니처럼 솜씨좋고 정중한 예술가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사정은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부도덕한 행위라고 무시하기엔 너무나도 맛깔스러운 것입니다.

3.

대스코인 가족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절한 마음과 화관]을 알렉 기네스의 연기 변신 견본품쯤으로 기억합니다. 하긴 이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알렉 기네스를 무시할 수는 없죠. 기네스는 이 영화에서 만치니에게 살해당하는 대스코인 집안 사람들 여덟명을 모두 혼자서 연기해냈습니다. 바람둥이 망나니 귀족, 끝도 없이 전쟁 회고담을 되풀이 늘어놓는 퇴역 장군, 뻣뻣하기 그지 없는 해군 제독, 열성적인 여성 해방운동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늙은 목사, 엄격한 아내에게 눌려 지내는 사진광, 인간성 더러운 공작, 마음 약한 은행가...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두더지 잡기 게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알렉 기네스 한 명을 때려 잡으면 또다른 알렉 기네스가 다른 데서 튀어오르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기네스는 그가 연기한 캐릭터 여덟 명에게 모두 그럴싸한 개성을 부여합니다. 그의 변장 실력도 뛰어나지만 역시 여기서부터는 배우의 실력이더군요. 그는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을 단순한 조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몇몇은 등장하는 시간이 지나치게 짧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시간 여유가 없긴 하지만 몇몇은 놀라울 정도로 강한 인간의 체취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헨리와 애스코인의 캐릭터는요.

그러나 알렉 기네스의 서커스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영화의 정수를 놓치고 맙니다. 기네스만큼이나 만치니 역의 데니스 프라이스 역시 중요합니다. 그의 우아한 냉담함이 없었다면 [친절한 마음과 화관]이라는 영화는 지금처럼 블랙 코미디의 고전이 될 수 없었겠지요. 그가 그 뒤로 영화운이 없었던 건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조운 그린우드와 발레리 홉슨 역시 만치니에게 영향을 행세하는 두 여자들을 적절하게 소화해냅니다. 이 영화의 캐스팅은 거의 완벽합니다. (02/01/14)

DJUNA

기타등등

마이크 니콜스 감독, 로빈 윌리엄스와 윌 스미스 주연의 리메이크 계획이 한동안 떠돌았습니다. 요새는 짐 캐리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영화가 정말로 나와도 원작의 정수를 다시 부활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할리우드 코미디의 요란함과 이 이야기의 영국식 차가움이 제대로 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