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리들리 스코트 Ridley Scott

주연
올란도 블룸....발리앙
Orlando Bloom....Balian
리암 니슨....고드프리
Liam Neeson....Godfrey
에바 그린....시빌라
Eva Green....Sibylla
브렌든 글리슨....레날드
Brendan Gleeson....Reynald
제레미 아이언즈....티베리아스
Jeremy Irons....Tiberias
에드워드 노튼....보드앵 4세
Edward Norton....King Baldwin
데이빗 튤리스....구호기사
David Thewlis....Hospitaler
마튼 코사스....기 드 뤼지냥
Marton Csokas....Guy de Lusignan
가산 마수드....살라딘
Ghassan Massoud....Saladin
이언 글렌....사자왕 리처드
Iain Glen....Richard Coeur de Lion

발리앙

[킹덤 오브 헤븐]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제2차 십자군의 패망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인 주인공은 십자군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낸 살라딘이어야 하겠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예루살렘에서 살라딘에 대항했던 발리앙입니다. 하긴 대량학살로 끝날 수도 있었던 전쟁에서 그만큼 버티면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면 그건 대단한 일이긴 하죠. 그것도 살라딘의 관대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요.

그렇다고 이 영화가 사실적인 역사 교과서의 역할을 한다는 건 아닙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존인물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극적인 재미나 주제를 위해 왜곡되거나 개조되었습니다. 발리앙은 평민 대장장이가 아니었고 보드앵 4세는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죽었죠. 보드앵 4세의 동생 시빌라와 발리앙의 러브 스토리도 철저한 허구입니다.

당연히 영화에서 중요한 건 실제 역사인 십자군 원정이 아니라 그 소재를 통해 전달하려는 현대적인 메시지입니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한지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중동은 여전히 세계의 화약고니까요.

[킹덤 오브 헤븐]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물론 영화는 십자군 원정에 냉소적입니다. 이건 의식적인 정치적 공정성과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21세기 서구인이라면 당연히 십자군 원정에 긍정적이긴 힘들테니까요. 영화는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 역시 아닙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저질렀던 끔찍한 만행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꼭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영화는 제도권 종교라는 것의 무익함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 같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의 편가르기를 보면 그 사실이 더 분명해집니다. 이 영화가 그리는 발리앙과 살라딘은 모두 세속적인 영웅입니다. 특히 발리앙은요. 믿음을 잃은 기독교인인 그가 중요시하는 것은 그의 보호하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과 자유입니다. 그가 훌륭한 군인인 건 종교의 광기에 휘말려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뛰어들만큼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고요. 보다 묘사는 짧지만 살라딘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그려집니다. 그가 훌륭한 지도자이며 군인인 건 광신과 복수심에 불타 날뛰는 대신 그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조건하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미천한 사람들의 생명을 훨씬 중요시하는 법이죠.

영화는 여전히 많은 종교적 질문들을 던지지만 그 해답을 제도권 종교에서 찾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긍정적인 종교인으로 나오는 데이빗 튤리스의 구호기사단원도 정작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죠. 영화는 제도에 대한 집착과 우월감보다는 가치있는 행동에서 구원의 길을 찾습니다. 이게 유일한 길이라면 교회는 학살과 부정의 핑계일 뿐이죠. [킹덤 오브 헤븐]이 가치있게 여기는 유일한 믿음은 휴머니즘입니다.

영화는 종종 지나치게 앞서 나가기도 합니다. 발리앙이 계급평등을 외치는 평민영웅으로 묘사된 건 좀 심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번지르르하게 그를 묘사할 필요는 없었어요. 아무리 캐릭터를 멋지게 살리고 싶었어도 그가 살던 시대에서 몰아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올란도 블룸의 캐스팅에도 불만일 겁니다. 그는 결코 블록버스터의 영웅이 될만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는 아니니까요. 저 역시 블룸에 대한 농담은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럴 거고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블룸의 캐스팅은 논리적입니다. 일단 스코트가 맨 처음 발리앙 역으로 고려했던 배우는 폴 베타니였답니다. 어차피 러셀 크로우와 같은 느끼한 카리스마는 처음부터 논외였던 거죠. 블룸의 무표정함과 소극성은 영화의 주제와도 맞습니다. 이 영화는 하나의 믿음이나 목적에 몰입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영광의 함정에 빠트리는 영웅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식적인 판단하에 최선의 선택을 이끌어내려는 전문가의 이야기지요.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장려한 몰락이 아니라 이성적인 협상입니다. 물론 블룸이 이 캐릭터에 어울리는 현명함을 조금 더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 정도도 감상엔 무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발리앙은 그가 대적했던 살라딘에 비하면 하수였으니 지나친 무게감을 줄 필요는 없겠죠.

그러고 보면 영화는 대자본을 투여한 블록버스터치고는 참으로 조용합니다. 아드레날린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결여되어 있지요. 수많은 전투 장면이 등장하지만 관객들은 결코 어느 한쪽에 전적으로 몰입되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관심있는 방문자처럼 멀리 떨어져 전투를 바라보겠지요. 리들리 스코트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발리앙처럼 조금 지치고 무표정한 어투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역시 논리적인 선택이지만, 피튀기는 액션 영화를 기대하고 온 많은 관객들은 여기에 당황하거나 불만이었을 겁니다. 하긴 이성적인 패장의 이야기에서 그런 걸 기대하고 온 사람들이 잘못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트는 안정된 서사극 전문가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의 전작 [글래디에이터]만 해도 현대적인 뮤직비디오 스타일과 고전적인 사극이라는 소재가 삐걱거리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스타일과 소재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군요. 여전히 50년대 사극같지는 않지만 정말 그들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킹덤 오브 헤븐]은 21세기 초 할리우드 서사극 스타일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05/05/09)

DJUNA

기타등등

당시 예루살렘에서 전쟁을 벌였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말을 썼던 걸까요? 살라딘과 발리앙은 어느나라 말로 대화를 했을까요? 둘 사이에 통역이 필요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