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클로드 샤브롤 Claude Chabrol

주연
상드린느 보네르....소피
Sandrine Bonnaire....Sophie
이자벨 위페르....잔느
Isabelle Huppert....Jeanne
재클린 비셋....카트린느
Jacqueline Bisset....Catherine
비르지니 르도양....멜린다
Virginie Ledoyen....Melinda
장 피에르 카셀....조르주
Jean-Pierre Cassel....Georges
발렌틴 메를레....쥘
Valentin Merlet....Gilles
줄리앙 로쉬포르....제레미
Julien Rochefort....Jeremie
도미니크 프로....마담 랑티에
Dominique Frot....Madame Lantier
장 프랑스와 페리에....신부
Jean-François Perrier....Priest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잔느와 소피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 [의식]의 원작은 루스 랜들의 추리소설 [A Judgement in Stone]입니다. 이 작품은 샤브롤의 영화가 나오기 전인 86년에 동명의 영화로 각색된 적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원작이 [유니스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적 있고요.

랜들의 소설은 문맹인 중년의 가정부가 친구와 함께 고용주의 가족을 몰살시키기까지의 과정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 위에 스포일러 경고를 달았지만, 이게 소설에 대한 글이었다면 그런 경고 따위는 필요없었을 거예요. 소설은 이렇게 시작되니까요. "유니스 피치먼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랜들은 결말을 맨 앞에 던져놓고 잔인할 정도로 매정하게 그 과정과 동기를 탐구합니다.

줄거리만 따진다면 샤브롤의 영화는 랜들의 원작에 충실합니다. 무대를 70년대 말의 영국 시골에서 90년대 말 브르타뉴의 소도시로 옮겼지만, 영화는 원작이 한 이야기들을 거의 그대로 반복합니다. 유니스 피치먼이 친구 조운 스미스와 함께 텔레비전으로 [돈 조바니]를 보고 있던 커버데일 일가를 총으로 쏴 죽인 것처럼 영화 속의 소피와 잔느도 거의 같은 과정을 밟은 뒤 텔레비전으로 [돈 조바니]를 보고 있던 를리브르 가족을 총으로 쏴죽입니다.

물론 우리는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영화가 주인공 소피를 묘사하는 방식이지요. 40대 후반의 못생긴 영국 가정부가 상드린느 보네르가 연기한 아름다운 20대 여성으로 바뀌었으니까요. 샤브롤은 랜들이 소설 첫 문장에서 밝혔던 소피의 비밀을 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직접 폭로하는 대신 관객들로 하여금 서서히 찾아내게 하는 것이죠.

표면적인 차이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간단한 차이점을 조금 더 눈여겨 보면 랜들의 접근법과 샤브롤의 접근법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거든요.

다시 '매정하다'라는 표현을 꺼내야겠습니다. 저는 종종 샤브롤이 얼마나 냉정하고 매정한 인물인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루스 랜들은 샤브롤보다 훨씬 매정한 사람입니다. 거의 급수가 다르다고 느껴질 지경이지요. 랜들은 자신이 창조한 살인범들인 유니스와 조운에 대해 어떤 감상이나 애정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샤브롤은 다릅니다. 여전히 그는 랜들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지만 랜들보다 소피에 대해 훨씬 감정이입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소피의 수치심과 당혹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동정합니다. 물론 상드린느 보네르보다 더 나이 들고 못생기고 덜 유명한 배우가 소피를 연기했다면 이런 이입은 힘들었겠지요.

샤브롤은 이 간단한 캐스팅 전환을 통해 무시무시한 이상심리물이었던 루스 랜들의 소설을 보다 보편적인 계급갈등에 대한 이야기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랜들의 소설에도 계급갈등의 측면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유니스와 커버데일 가족의 갈등은 비교적 특수했습니다. 계급차이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소설에서 정말 중요한 건 그들의 특수한 차이였습니다. 유니스가 문맹이라는 사실과 커버데일 가족이 유달리 교양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말이죠. 유니스를 살인으로 몰고가는 친구 조운 역시 극단적인 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샤브롤의 영화에서 이 특수성들은 모두 계급갈등이라는 큰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보조수단이 됩니다. 샤브롤의 각색에서 랜들의 무자비한 심리묘사는 약화됩니다. 대신 영화는 소피와 잔느의 살인을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묵시록적(또는 막시즘적) 처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소피는 비틀린 이상성격자가 아니라 매정하고 아름다운 운명의 여신입니다. 여기서 루스 랜들의 차갑고 분석적인 블랙 유머는 샤브롤로 넘어오는 동안 야유섞인 정치적 농담이 되지요.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이들을 선악의 잣대로 재고 있는 건 아닙니다. 어느 정도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소피는 범죄자 기질이 있는 위태로운 인물이고 잔느는 위험한 성격의 정신병적 살인마입니다. 피해자인 를리브르 가족은 프랑스 지식인답게 특별히 유산계급의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교양인들이고요. 한 사람 한 사람만 따진다면 를리브르 가족들은 이런 일들을 당해도 싼 사람들이 아닙니다. 운나쁘게 사람 잘못 고용해서 목숨을 잃은 딱한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더 묵시록적 야유처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들의 죄는 부르주아 계급이고 고용주라는 사실 자체이니 말입니다.

영화는 상드린느 보네르와 이자벨 위페르라는 두 배우들에게 근사한 연기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소피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위페르에게 더 어울리는 역이죠. 위페르는 이상심리에 밝고 무시무시한 무표정함으로 유명하니까요.

하지만 샤브롤은 보네르에게 그 역을 넘기면서 아주 효과적인 소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보네르는 위페르 같았다면 담담한 건조함으로 다루었을 몇몇 장면들을 장려하기까지한 큰 표현법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필기체로 쓰여진 쪽지를 읽으려고 필사적으로 시도하는 보네르의 얼굴은 거의 작은 오페라와도 같습니다. 보네르의 연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표정함도 위페르의 샐쭉한 무표정함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보다 장엄하달까요.

반대로 위페르는 이 영화에서 지금까지 그 사람을 유명하게 한 독특한 건조함을 말끔하게 벗어던졌습니다. 이 영화의 위페르는 경박하고 수다스러우며 캐릭터의 정신적인 불안함을 적극적으로 폭로하고 있습니다. 위페르는 보네르와 멋진 짝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스타의 에고를 드러내는 일 없이 주인공인 후배를 완벽하게 보조해주고 있지요. 둘은 이 영화로 베네치아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03/12/19)

DJUNA

기타등등

1. 제목으로 쓰인 'La Cérémonie'는 사형수가 단두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가리키는 속어입니다.

2. 영화 중간에 텔레비전에서 샤브롤 자신의 작품인 [붉은 결혼식]이 나온답니다.

3. 70년대의 설정이 90년대로 옮겨오면서 어긋나는 구석이 하나 있습니다. 소피와 잔느의 범죄를 폭로하는 녹음기 말이에요. 70년대말이라면 녹음기로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오페라를 녹음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라면 가정용 비디오 테이프가 보편화된 시절이었지요. 를리브르 가족 정도였다면 그처럼 구차한 녹음 테이프를 만드는 대신 그냥 녹화를 하거나 비디오 테이프를 샀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