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조지 A. 로메로 George A. Romero

주연
사이먼 베이커....라일리
Simon Baker....Riley
존 레기자모....촐로
John Leguizamo....Cholo
데니스 호퍼....카우프먼
Dennis Hopper....Kaufman
아지아 아르젠토....슬랙
Asia Argento....Slack
로버트 조이....찰리
Robert Joy....Charlie
유진 클락....빅 대디
Eugene Clark....Big Daddy

슬랙과 라일리

[랜드 오브 데드]의 한국 포스터 카피는 신성모독입니다. '[새벽의 저주] 이후 1년'이라고요? 그럼 조지 A. 로메로의 네 번째 좀비 영화가 잭 스나이더가 만든 리메이크의 속편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로메로의 영화들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 관객들에게 이 카피는 이치가 맞아보입니다. 로메로가 스나이더의 비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의 이전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투박하고 강렬한 B급 영화의 느낌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랜드 오브 데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류 영화입니다. 특수효과는 깔끔하고 가끔 튀어나오는 고어 장면들도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는 않지요. 게다가 일급 스타들도 나옵니다. 데니스 호퍼, 아시아 아르젠토, 존 레기자모 같은 사람들 말이에요. 이전 3부작에서는 어림없는 일이었지요.

로메로도 늙은 걸까요? 물론이죠. [시체들의 낮]이 만들어진 게 벌써 20년 전입니다. 당연히 이 아저씨도 그 동안 늙었죠. 솔직히 아이디어 자체도 그와 마찬가지로 늙었다고 할 수 있어요. 로메로 팬들에겐 [랜드 오브 데드]의 줄거리가 아주 익숙하게 느껴질텐데, 그건 이 영화에 나오는 설정 상당부분이 [시체들의 낮]의 오리지널 각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작비 때문에 포기했던 아이디어들을 썩히고 있다가 20년 뒤에 다시 살린 거예요.

그러나 이 영화가 이전의 [시체 3부작] 영화들보다 안전하고 늙어보이는 진짜 이유는 그 동안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시체 3부작]이 나왔을 때, 그 작품들은 'ne plus ultra'였습니다. 당시 호러 장르가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지점의 선 작품들이었지요. 하지만 그 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관객들은 로메로와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단련되었습니다. 로메로는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며 이전과 같은 영화들을 만들고 있는데 관객들은 더 이상 이 정도의 자극에 놀라지 않게 된 거예요. 이제 로메로는 더 이상 자극의 첨단에 선 예술가가 아닙니다. 느긋하게 익숙한 공식을 휘둘러대는 노장이지요. 아마 그는 첨단에 서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요새 관객들을 자극하려고 무리하다보면 내용까지 날려버리기 십상이니까요. 그 결과 완성된 건 할리우드 A급 스탭들과 넉넉한 제작비로 완성된 멀끔한 주류영화였어요.

슬슬 영화 이야기를 하죠. 우선 배경.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이미 좀비들에게 정복당했습니다. 좀비들은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고 있고 소수의 인간 생존자들은 강으로 고립된 대도시에 살죠. 돈많은 권력자들이 피들러즈 그린이라는 거대한 마천루 안에서 이전의 부유한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며 넉넉하게 사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의 변두리에서 위태로운 삶을 삽니다.

어떻게 이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저도 모릅니다. 아마 전 지구가 좀비들에게 정복당했다면 피들러스 그린의 권력자들에게도 이전의 힘은 없을 겁니다. 그들이 가진 돈도 별 의미가 없을 거고요. 진짜 권력은 무장 트럭 '데드 리코닝'을 타고 좀비들이 지배하는 세계로 나가 실용품을 구해오는 우리의 주인공 라일리나 촐로 같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야 해요. 도시의 빈민들도 부자들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밖으로 나가 피들러즈 그린과 같은 마천루를 정복해서 부자들처럼 살면 되니까요. [시체들의 새벽]에서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로메로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시스템이 이 세상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우깁니다. 사실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대상은 좀비들이 정복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 그가 살고 있는 9/11 이후 미국의 현재 사회거든요. [랜드 오브 데드]는 [시체들의 낮]처럼 노골적인 풍자물입니다. 좀비들의 공격을 받는 극도로 계급화 된 마천루 도시라는 설정부터 다른 식으로 읽을 수가 없어요. 심지어 좀비들을 멍하게 하기 위해 쏘아올리는 폭죽과 같은 자잘한 요소들도 상징적인 역할을 합니다. 너무 딱딱 맞아서 오히려 여유가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죠. 이전처럼 "어쩌다 보니 다들 그렇게 해석들을 하더라" 따위의 변명은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피들러즈 그린은 서서히 붕괴됩니다. 밑에서는 불만을 품은 하층계급이 치고 올라오고 있었고, 밖에서는 서서히 초보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개발하고 빅 대디라는 흑인 좀비를 리더로 맞아들인 좀비들이 도시를 침략하려 하고 있었죠. 영화가 끝날 무렵엔 피들러즈 그린은 피투성이 학살의 무대가 되는데, 아마 이걸 스포일러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랜드 오브 데드]는 여전히 거장의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좀비들은 학살용 고깃덩어리들인 후배들과는 달리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요. 그것도 그냥 고정된 스타일이 아니라 1편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때부터 조금씩 발전해온 스타일이죠. 1편의 좀비들이 사람살을 뜯어먹는 끔찍한 구울족들이고, 2편의 좀비들이 현대 소비 사회의 유령들이고, 3편의 좀비들이 썩어빠진 군인들을 처형하는 청소부라면, 4편의 좀비들은 인간들의 압제와 학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자기들만의 진화의 길을 찾는 독립된 생명체들입니다. 계획대로 후속편들이 나온다면 이들은 계속 이전의 이미지들을 배반해가며 발전해가겠지요. 순수주의자들은 3부작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전 다음 영화들도 보고 싶습니다.

이전 작품들처럼 고어의 첨단을 걷지는 않지만, [랜드 오브 데드]는 여전히 즐거운 장면들을 잔뜩 담고 있습니다. 잔인무도함과 발랄한 유머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으며 좀비들과 인간들 사이의 생살 찢기를 그려내는 로메로의 실력은 여전합니다. 톰 새비니의 좀비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반갑고, 강물에서 기어올라오는 좀비들의 이미지에서 [영혼의 카니발]의 오마주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즐겁습니다. 아지아 아르젠토는 영화에 그 사람의 괴팍한 아름다움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시체들의 새벽]과 아버지 다리오 아르젠토 사이의 관계를 상기시켜주기도 합니다. 심지어 40년대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쓴 유니버설 로고도 즐겁군요.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전 [랜드 오브 데드]가 불필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시체] 시리즈의 새로운 장을 연 영화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로메로는 그저 그가 전에 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지은 것뿐입니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갔다면 [시체들의 낮]과 [랜드 오브 데드]는 하나의 영화여야 했을테니까요. (05/09/02)

DJUNA

기타등등

1. 캐나다에서 찍은 최초의 [시체] 영화입니다. 로메로는 이 작품도 피츠버그에서 찍고 싶었다지만 어쩌겠어요. 돈이 웬수지.

2. 좀비로 분장한 사이먼 페그와 에드가 라이트를 찾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