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쥘 미무니 Gilles Mimouni

주연
로만느 보랑제....알리스
Romane Bohringer....Alice
모니카 벨루치....리사
Monica Bellucci....Lisa
뱅상 카셀....막스
Vincent Cassel....Max
장-필립 에코페이....루시앵
Jean-Philippe Écoffey....Lucien
상드린 키베를랭....뮤리엘
Sandrine Kiberlain....Muriel
올리비에 그라니에....다니엘
Olivier Granier....Daniel

1.

살인이 스토리의 중심이 아닐 뿐이지, [L'Appartement]은 전형적인 프랑스식 추리소설의 모든 요소들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프랑스식 추리소설'이라고 할 때는, '팡토마'나 르블랑식 모험담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조르즈 시므농식 심리물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L'Appartement]은 비교적 후기의 작가들, 그러니까 세바스티앙 자프리조, 브왈로-나르스자끄와 같은 사람들의 작품을 연상시킵니다. 음모로 얽힌 복잡한 플롯을 비비꼬다가 가끔 반전을 핑핑 터뜨리는 그런 소설들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2.

유달리 [현기증]을 닮았다고 지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현기증]의 원작자들이 브왈로-나르스자끄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계시겠지요? 그 역시 프랑스식 추리 소설이니 닮은 건 당연하겠고 또 실제로 많은 부분이 직접적으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L'Appartement]의 퍼즐은 [현기증]에도, [죽은 자들의 사이에서]에도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시작은 좋습니다. 주인공 막스는 예전에 헤어졌던 여자 친구 리사로 여겨지는 여자의 대화통화를 엿듣고 그 여자를 찾기 위해 나섭니다. 곳곳에 삽입된 회상장면으로 그의 동기는 정당화되고 그가 놓칠 듯 놓칠 듯 하면서 리사를 쫓아갈 때는 적절한 수준에서 서스펜스가 증폭됩니다.

그러나 일단 그가 알리스를 만난 뒤에는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알리스가 엉뚱한 문을 열었을 때부터 관객들은 대충 사태를 짐작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리스의 입장에서 설명해주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도 영화가 아직도 반이나 남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관객들이 알리스에게 도대체 호감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일단 플롯의 문제가 있습니다.

비슷한 플롯을 가지고 있는 [현기증]을 볼까요? 히치콕도 영화 중간에 진상을 폭로해서 스코티를 주인공 자리에서 몰아내고 주디의 시점에서 영화를 풀어가는 재주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히치콕은 찌꺼기 미스테리를 계속 남겨서 관객들을 귀찮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디에 대해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에 들볶이지 않고 주디에게 감정이입하면서 남아있는 서스펜스를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L'Appartement]의 경우 남은 미스테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밝혀도 놀라울 것 없고, 안 밝혀도 그만인 그런 것들입니다. 그 결과 알리스는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모호한 인물로 남게 됩니다.

게다가 알리스는 진상이 밝혀진 뒤에도 불쾌한 인물입니다. 순수하게 사악한 인물이라면 우리는 매료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리스는 어설프게 뒷끝이 안 좋은 음모들을 질질 끌어서,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면서도 자기 잇속도 챙기지 못합니다. 알리스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저게 내 거가 못된다면 너도 못가져.'의 놀부 심보에서 나온 것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누구보다도 요란한 감정을 표출하지만 도대체 감정 이입이 되지 않고 행동도 정당화 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동정이 안가요. 그런 인물이 주인공이 되었으니 영화보는 기분이 '될 대로 되라'가 될 수밖에.

3.

이런 플롯은 종종 믿을 수 없는 행동들을 포함하게 되는데, 이 영 화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단 리사와 막스가 헤어지는 장면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어디론가 급하게 떠나게 되어서 그걸 누구한테 알리려고 한다면 굼뱅이 메일로, 그것도 남에게 시켜서 연락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굼뱅이 메일이 도착할 때까지는 그 사람이 거기 있다는 걸 안다는 말이니 전화가 더 상식적이죠. 알리스의 음모도 가끔 앞뒤가 맞지 않는데, 대부분이 즉흥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앞일을 예언이라도 할 줄 아는 것처럼 앞의 단계의 다리를 놓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드러날 게 뻔한 음모를 지나치게 오래 끌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대책이 전혀 없습니다.

한심한 묘사는 막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혼녀도 팽개치고 옛 사랑을 쫓아왔는데, 어디선가 처음 만난 여자가 귀찮게 굴다가 일기를 하나 던져 주었다고 헬렐레해가지고 공항까지 따라나가는 건 뭡니까? 게다가 그렇게 사람들을 귀찮게 만들면서 남자를 끌고 왔는데 갑자기 성인군자 가 되어서 혼자 떠나가는 알리스는 뭐고? 이런 이야기를 믿으라고요?

4.

피터 체이스의 음악은, 의도적이겠지만, [원초적 본능]을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으로 표절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양심에 좀 찔릴 거라 생각됩니다.

로만느 보랑제는 아슬아슬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입니다. 이 배우는 [미나 타넨바움]에서처럼 관객들의 누선을 자극할 수도 있지만 잘못 나가면 정말 짜증날 때도 많은데, 바로 [L'Appartement]이 그 짜증의 극한입니다. 하긴 알리스라는 캐릭터가 원래 그러니 어쩌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죠.

뱅상 카셀은 괜찮은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지만 잘나가는 전문직 직업인보다는 까까머리 건달로 나와 깩깩 고함을 질러대는 게 더 어울립니다.

가장 덕을 본 배우는 모니카 벨루치 같은데, 비교적 무난한 수준의 연기였지만 예전의 그 끈덕진 느낌이 말끔하게 가셔서 보기가 편했습니다. (97/03/28)

D&P

기타등등

다들 아시겠지만 [L'Appartement]은 [라 빠르망]으로 발음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