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레몽 베르나르 Raymond Bernard

주연
아리 보르....장 발장
Harry Baur....Jean Valjean
샤를 바넬....자베르 경위
Charles Vanel....Inspecteur Javert
샤를 듈랭....테나르디에
Charles Dullin....Thénardier
에밀 제느브와....가브로쉬
Émile Genevois....Gavroche
헨리 크라우스....뮤리엘 주교
Henry Krauss....Monseigneur Myriel
장 세르베....마리우스 퐁메르시
Jean Servais....Marius Pontmercy
오란 드마지....에포닌
Orane Demazis....Eponine
플로레이유....팡틴
Florelle....Fantine
조슬린 가엘....코제트
Josseline Gaël....Cosette

장 발장

레몽 베르나르의 [레 미제라블]은 거의 20년이 넘게 제가 찾고 있었던 영화입니다. 최고의 [레 미제라블] 영화라고 소문은 돌았지만, 정작 제가 구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죠. 그러는 동안에도 꾸준히 [레 미제라블]의 각색 영화들이 나왔는데, 모두 시시하거나 평범해서 베르나르의 이 영화에 대한 기대는 계속 부풀었지요.

마침내 오늘 이 영화를 봤습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이클립스 DVD 시리즈 중 하나로 베르나르의 영화 두 편을 세트로 냈던 거죠. 같이 수록된 [나무 십자가]도 좋은 영화라는군요. 아직 못 봤지만.

베르나르의 [레 미제라블]의 가장 분명한 장점은 러닝타임입니다. 이 영화는 281분 짜리 3부작입니다. 웬만한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와 맞먹죠. 보통 극장용 각색본들이 시간이 없어 건너 뛰는 부분들도 이 영화에서는 느긋하게 다룹니다. 굉장히 알찬 각색물이죠. 예를 들어 전 이 영화처럼 바리케이드 장면을 세세하게 다룬 각색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라마르크의 장례식에서부터 출발해서 무관심한 구경꾼들, 군중의 동요, 총기 난사,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성실하게 그려내지요. 바리케이드 장면만 거의 50분을 차지해요. 그 정도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할 수 있지요.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은 주인공 장 발장을 연기한 아리 보르입니다. 그는 거의 이상적인 장 발장이에요. 많은 장 발장 배우들은 중반 이후의 성인군자 장 발장에 집착한 나머지 도입부의 위험하고 짐승같은 전과자 장 발장은 종종 건성으로 넘어갔죠. 하지만 이 영화의 장 발장은 도입부에서 정말로 위험하고 천박해 보입니다. 영화는 그런 그가 뮤리엘 신부를 만나 개심하고 갈등하고 마지막에 성인으로 죽는 과정을 어떤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지요. 영화는 종종 필요하다면 연극적인 독백까지 동원해 그의 내면으로 파고들기도 하는데, 보르는 이 모든 것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해냅니다. 최고예요. 발장과 대적하는 샤를 바넬도 그와 맞먹는 연기를 보여주고요.

영화는 30년대 전성기 프랑스 대중영화가 얼마나 근사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멋진 예이기도 합니다. 스케일부터 만만치 않아요. 바리케이드 장면만 해도 마을 하나를 통째로 삼킬만큼 거대한 야외 세트에서 벌어지는 걸요. 어쩔 수 없이 초기 유성영화의 테크닉적인 한계와 마주치긴 하지만 이 영화는 노련한 스튜디오의 장인들이 만든 양질의 대중영화입니다. 프로페셔널하고 거대하고 사실적이고 역사적 디테일로 넘쳐나지요. 이것만으로는 건조할 수 있겠지만 베르나르는 여기에 종종 멋들어진 시적 터치를 부여합니다. 영화가 커다란 물통을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가는 어린 코제트를 그리는 걸 보세요. 거의 그림 동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시적인 공포가 가득합니다. 한참 대공황을 겪고 있었던 1930년대라는 제작 시기는 영화의 현실성을 높이는 데 한 몫한 것 같고요.

하지만 전 여전히 이 작품을 완벽한 [레 미제라블] 각색물로 보지는 못하겠습니다. 제 논리는 유치할 정도로 단순해요. 원작에 충분히 충실하지 못하거든요. 원작에 충실한 영화가 가장 좋은 각색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레 미제라블]처럼 워낙 이야기가 좋은 작품이라면 원작을 그대로 따르는 게 좋아요.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어려울 테니까요.

베르나르의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좋은 부분은 원작, 적어도 원작의 정신에 충실한 장면들이고 아무래도 걸리는 부분은 원작에서 벗어난 장면들이거든요. 전 수녀원 장면을 잘라버리고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연애담을 후반부터 진행시키는 2부의 스토리 전개는 전혀 맘에 안 듭니다. 그 중간의 이야기를 맵시있게 정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연애담은 남아야 이들 캐릭터들이 살죠. 로맨스를 지워버리자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징징대는 어린애들 같습니다. 전 원작을 읽을 때마다 장 발장의 거의 피학적인 선택에 불평을 늘어놓지만, 중반 이후 테나르디에를 없애버리고 코제트의 결혼식 이후 급격하게 장 발장을 죽여버리는 결말은 싫더군요. 뭔가 심각하게 빠진 것 같습니다. 이건 러닝타임 부족으로 변명할 수 없어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 노골적인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전 여전히 베르나르의 [레 미제라블]을 가장 훌륭한 [레 미제라블] 영화라고 인정하렵니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레 미제라블] 영화들에 대한 기억도 여전히 좋지만 그래도 프랑스 영화 쪽이 당연히 더 나아보일 수밖에 없잖아요? (07/08/29)

DJUNA

기타등등

전 여전히 더 좋은 [레 미제라블] 각색물을 기다리지만, 제가 과연 제가 죽기 전까지 그 작품을 볼 수 있을는지? 러닝타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텔레비전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데, 텔레비전물은 조세 다양이 이미 한 번 망쳐놨잖아요. 그것도 심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