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빌 어거스트 Bille August

주연
리암 니슨....장 발장
Liam Neeson....Jean Valjean
제프리 러쉬....자베르
Geoffrey Rush....Javert
우마 서먼....팡틴느
Uma Thurman....Fantine
클레어 데인즈....코제트
Claire Danes....Cosette
한스 매더슨....마리우스
Hans Matheson....Marius

1.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얼마나 되는 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이 원작을 번안한 작품이 한 번 이상 만들어진 적 있죠. 다양한 번안 작품들까지 다 긁어모은다면 [레 미제라블] 영화 만으로 비디오 가게 하나 정도는 채우고 남을 거예요.

그 중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장 가뱅이 장 발장으로 출연한 프랑스 영화입니다. 가뱅의 둔중한 묵직함은 장 발장이라는 캐릭터에 아주 잘 맞아서 지금도 장 발장하면 이 배우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텔레비전으로 방영될 때는 바리케이트 장면이 잘려나갔었죠. :-)

리노 벤투라 주연의 프랑스 영화도 바리케이트 장면이 잘려나간 또 다른 예였습니다. 이 영화는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뒤 다시 영화로 상영되었는데 텔레비전 방영 당시에도 바리케이트 장면이 잘려 나갔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영어판 중에는 리처드 조던이 장 발장으로 나온 텔레비전 영화랑 마이클 레니가 발장으로 나온 헐리웃 버전이 있었습니다. 모두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것들이죠.

이들 중 영화 자체로서 인정받을 만한 영화가 있을까요? 글쎄요. 전 모르겠습니다. 장 가뱅이 나오는 영화는 최근에 유선 방송으로 다시 보았는데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떨어지는 영화였습니다. 리노 벤투라 주연의 영화는 그냥 무난하기만 했고요. 오히려 마이클 레니가 나왔던 헐리웃판 [레 미제라블]이 더 나았습니다. 그 영화의 클래식 헐리웃 스타일이 원작의 로맨티시즘을 더 잘 살렸던 것 같거든요. 하지만 이 역시 영화만으로 평가하기엔 좀 그랬습니다.

[레 미제라블]의 줄거리로 흥미진진한 영화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원작의 이야기가 워낙 좋으니까요. 하지만 4시간 미만의 러닝타임으로 원작을 떠올리지 않고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건 빅토르 위고의 이 묵직한 소설이 아주 '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레 미제라블]의 미덕은 한 시대를 어우르는 그 거대함에서 나옵니다. 이는 '장 발장이 빵 한 덩이를 훔쳐 감옥에 갔는데...'로 시작하는 축약판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축약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흥미진진한 캐릭터들 대부분은 각색을 위해 처형됩니다. 원작이 가진 역사적/사회적 차원도 많이 축소될 수밖에 없고요. 결국 아무리 잘 해봐야 '장 발장이 빵 한 덩이를 훔쳐 감옥에 갔는데...'일 수밖에 없는 거죠.

그 자체로만으로도 좋은 스토리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원작에서 탈출하는 건 어림없죠.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이 빵 한 덩이를 훔쳐 감옥에 갔는데...'는 사실 소설의 그 거대한 흐름을 끌어가기 위한 끌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다룬다면 영화는 짐은 남겨두고 끌개만 가져가는 셈이 됩니다.

2.

빌 어거스트의 [레 미제라블]은 지금까지 제가 본 각색물 중 가장 캐릭터 도살이 심한 영화입니다. 다른 각색물에서는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는 테나르디에 부부나 에포닌느는 끔찍하게 축소되거나 아예 나오지도 않으니까요.

아무래도 어거스트는 모두 다루어서 산만해지느니 가져갈 수 있는 것만 이용해서 보다 짜임새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보조 캐릭터들이 줄어든 대신 중심 인물인 장 발장, 자베르, 코제트에 더 정확한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요. 특히 코제트는 어떤 각색물보다 비중이 큰데, 에포닌느가 삭제된 빈 틈을 이용해서 보다 확실한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발장과 트러블을 일으키는 어거스트의 코제트는 원작의 코제트보다 어떤 면에서 더 사실적일 수도 있습니다. 원작에서 이 캐릭터는 도대체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짜임새 있는 영화를 만들 의도가 있다는 것만으로 영화가 짜임새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레 미제라블]은 빌 어거스트의 전작인 [영혼의 집]을 자꾸 떠올리게 합니다. 그의 [레 미제라블]은 [영혼의 집]만큼이나 산만한 영화입니다. 그렇게 많은 요소들을 잘라냈으면서도 영화는 여전히 완급없이 헐렁헐렁하게 흘러가기만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라는 말이 절로 나와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만큼을 잘라내고도 여전히 빨리 넘어가야할 만큼 액션이 많았다는 게 표면적인 핑계입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이 각색물을 만들기 위해 뽑아낸 액션들이 대부분 심리적인데, 그걸 빌 어거스트가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거죠. 사방에서 총알이 튀는 이야기지만 스토리의 기둥이 되는 갈등들은 캐릭터의 마음 속에서 일어납니다. 외면상으로는 장 발장과 자베르의 투쟁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장 발장과 자베르가 싸우는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두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장 발장이, 생 마티유가 자신으로 오인되어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자 갈등하는 장면과 자베르가 장 발장에 의해 풀려난 뒤 의무와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장면을요.

빌 어거스트가 이 두 장면을 위해 무얼 했을까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 발장은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을 폭로하고 자베르는 가만히 있다가 그냥 자살합니다. 총격전은 보여주지 않고 시체만 보여주는 꼴입니다.

차라리 뮤지컬이 훨씬 성공적으로 해치웠습니다.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의 뮤지컬은 그 어떤 영화 각색물보다도 꽉 찬 느낌을 줍니다. 그건 주인공들이 노래를 불러대며 내면의 액션을 밖으로 표출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어거스트의 영화에는 외면화의 도구가 전혀 없었습니다. 영화가 훌렁훌렁 넘어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3.

[레 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유가 바로 그 정서적인 힘이라는 것을 어거스트가 잊고 있었던 것도 영화의 힘을 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성인에서 악마로 넘나드는 원작의 강한 콘트라스트가 영화에는 전혀 살아있지 않습니다.

첫번째 원흉은 어거스트가 영화에 부여한 '현대적인' 터치입니다. 아마 극중인물들의 행동을 보다 '그럴싸하게' 만들어 현대 관객들에게도 어필하게 하려는 시도인 듯 한데, 결과는 썩 좋지 못했습니다. 바로 주인공들의 극단적인 능력과 행동이 힘의 원천이었는데 그걸 적당히 이치에 닿게 만들었으니 어정쩡해져 버린 게 당연하죠. 그 결과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러브 스토리는, 그처럼 많은 공간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베르의 자살은 그럴싸함을 추구한 각색 속에서 너무 튀고요. 특히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 있는 결말은 거의 보기가 안스러울 지경입니다.

원작의 역사적/사회적 차원을 거의 철저하게 지워버린 것도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프랑스는 당시의 실제 프랑스라기 보다는 허공에 뜬 중성적인 공간입니다. 역사적인 힌트를 주는 것은 라마르크의 장례식에 대한 장 발장의 짧은 언급인데, 이 정도로는 바리케이트 신의 클라이맥스를 만드는 데엔 어림없습니다.

이 정도의 축소로도 모자랐는지, 어거스트는 한 걸음 더 나갑니다. 그는 바리케이트 클라이맥스 전체를 '장 발장이 빵 한 덩이를 훔쳐 감옥에 갔는데...' 스토리에 봉사하게 뜯어 고칩니다. 순수주의자들에게 이런 각색은 거의 모욕적일 겁니다. 순수주의자가 아닌 관객들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겠지요. '도구로서의 바리케이트'는 아무래도 에너지가 떨어집니다. 게다가 이치에 맞지도 않죠. 폭동이 일어났는데 탈옥수 하나 잡으려고 바리케이트 안으로 잠입하는 경찰은 뭔가 어색하지 않습니까?

4.

리암 니슨은 좋습니다. 일단 묵직한 외모부터가 캐릭터에 대충 맞아 보입니다. 그는 서글픈 선량함을 표출하는데 능한 배우이고 이 영화에서도 그의 재능이 아주 잘 살아 있습니다.

가장 인상깊었던 배우는 우마 서먼입니다. 서먼은 영화에 따라 연기의 질이 심하게 차이가 나는 배우인데, 이 영화의 팡틴느는 훌륭합니다. 공감가고 힘이 넘칩니다.

그러나 제프리 러쉬의 자베르와 클레어 데인즈의 코제트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러쉬의 건조한 연기는 자베르의 캐릭터에 대충 맞지만 정작 필요한 클라이맥스에서 충분한 공간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연기는 미완성입니다. 클레어 데인즈는 1830년대의 여성으로 보이기에는 지나치게 현대적이고요.

5.

영화를 보고 나니 원작을 다시 읽고 싶어졌습니다. 집에 있는 구닥다리 정음사 번역본을 다시 꺼내 읽어봐야 할까봐요. 이 영화가 저한테 해준 게 있다면 원작에 대한 옛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 준 것 뿐입니다.

정동 이벤트 홀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시설은 깨끗하지만 영사 상태가 안좋고 필름도 아주 나쁘더군요. 지금까지 개봉관에서 그렇게 상태가 나쁜 필름으로 영화를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99/04/01)

DJUNA

기타등등

만족스럽게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24시간 짜리 미니 시리즈를 만드는 거죠. 누가 한 번 해주었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