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들 Les Vampires (1915) * * * 1/2

감독
루이 푀이야드 Louis Feuillade

주연
무시도라....이르마 벱
Musidora....Irma Vep
에두아르 마테....필립 게랑드
Edouard Mathé....Philippe Guérande
마르셀 레베스크....오스카르 마자메트
Marcel Lévesque....Oscar Mazamette
장 에메....대흡혈귀
Jean Aymé....Le Grand Vampire
페르낭 에르망....후안-호세 모레노
Fernand Herrmann....Juan-José Moréno
루이 로바....사타나스
Louis Leubas....Satanas
보-드-장....위스타쉬 마자메트
Bout-de-Zan....Eustache Mazamette
델핀느 르노....게랑드의 어머니
Delphine Renot....Mère de Guérande
프레데릭 모리스....베네노스
Frederik Moriss....Vénénos

1.

필립과 마자메트
루이 푀이야드의 [흡혈귀들]은 1915년에 제작된 무성 영화 시리즈입니다. 총 열편으로, 전체 상영시간은 400분 쯤 걸립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이런 종류의 연속극 시리즈가 꽤 흔했습니다. 2시간 안쪽의 장편 영화에만 익숙한 요새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텔레비전이 없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연속극을 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푼돈을 털어 극장에 갈 수밖에 없었어요.

[흡혈귀들]은 당시 대단한 히트작이었습니다. 1915년부터 1916년 사이에 이 영화의 에피소드가 하나씩 상영될 때마다 사람들은 거의 미사 드리듯 극장을 찾았습니다. 하긴 당시 사람들에겐 도피할 거리가 필요했을 거예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때였으니까요. 그리고 [흡혈귀들]은 정말 근사한 도피처였지요.

2.

가스 공격
제목은 [흡혈귀들]이지만 이 영화는 흡혈귀 영화가 아닙니다. 'Les Vampires'은 이 영화의 악당인 범죄 집단의 이름입니다. 영화는 주인공인 민완 신문 기자 필립 게랑드가 전직 범죄자인 마자메트와 함께 Les Vampires 일당을 추적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19세기 프랑스 대중 문학의 전통을 잇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엔 이런 이야기들이 유행했잖아요. 가보리오나 가스통 르루의 소설들이나 [팡토마]나 [뤼팽] 시리즈를 생각해보세요. 물론 조금 더 문학적인 인용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 알렉상드르 뒤마나 으젠느 수와 같은 작가들을 언급하시겠지요.

하여간 당시 추리 소설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흡혈귀들]이 거의 고향에 온 것 같이 푸근하게 느껴질 겁니다. 온갖 익숙한 도구들이 잔뜩 나오지요. 비밀 통로, 보물 지도, 마취 가스, 최면술, 토막 살해당한 시체의 사라진 머리, 신출귀몰하는 괴도, 변장의 명수들, 암호책...

이 영화에서 어떤 야무진 스토리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푀이야드가 이 영화를 찍으면서 과연 결말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전체적인 줄거리를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보기엔 굉장히 구멍이 많거든요. 예를 들어 Les Vampires의 두목인 대흡혈귀는 부하가 자기 독 펜으로 살해된 걸 발견하자 "우리 사이에 밀고자가 있어!"라고 외칩니다. 정상적인 영화라면 당연히 두목이 밀고자를 색출하는 과정이 나와야겠지요? 하지만 다음 편에 가면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엄연히 동료인 마자메트가 필립을 구해 나갔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추적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가장 유명한 캐릭터인 이르마 벱은 3부에서나 간신히 등장하고 Les Vampires의 두목들은 세 차례나 바뀝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충 무시해도 됩니다. 왜인지 몰라도 전 무성 영화 시대의 구멍난 스토리에는 관대해져요. 한창 대중 소설의 테크닉이 절정에 달했던 20세기 초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관대하게 보았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무성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당연한 이야기도 비현실적인 꿈처럼 바꾸어놓은 힘이 있지 않아요?

[흡혈귀들]의 가장 큰 매력도 바로 그런 비현실성입니다. 당시 초현실주의들이나 다다이스트들을 끌어들였던 이 영화의 매력도 바로 그런 것이었지요. 영화는 20세기 초로 접어드는 벨 에포크 시대 말의 프랑스 분위기를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그 배경에서 펼쳐지는 모험담은 거의 동화처럼 환상적이니까요.

종종 둘은 엉뚱한 곳에서 마주치기도 합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필립이 총알 구멍을 타고 스며나온 기름 자국을 따라 Les Vampires의 소굴로 잠입하는 장면 같은 것은 그렇습니다. 자동차와 석유라는 20세기적인 요소에 페로의 동화가 끼어든 셈이라고 할까요?

3.

이르마 벱
우리 같은 현대 관객들의 눈에 가장 흥미롭게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환상과 리얼리즘이라는 상반되는 두 도구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프랑스를 그려내는 방식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영화라는 현대적인 장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구식인 사람들입니다. 20세기인들이지만 아직 19세기에 살고 있지요. 턱수염을 기른 남자들과 코르셋은 입은 여자들이 반쯤은 흥분되고 반쯤은 겁먹은 표정으로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이런 19세기 사람들에게 20세기의 본때를 보여주는 사람들은 바로 Les Vampires입니다. 이들이 강도질을 위해 사용하는 마취 가스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막 역사를 시작한 화학전의 악몽과 연결되었을 겁니다. 보다 예민한 사람들에게 이 무시무시한 강도 집단은 계급 혁명의 징조로 여겨졌을 수도 있었겠죠. 축음기와 자동차, 화학 약품들을 이용한 그들의 범죄 행각 역시 서서히 20세기식으로 진화해가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인물인 이르마 벱도 예외는 아닙니다. [흡혈귀들]의 주인공은 필립이지만 관객들은 이 정의로운 영웅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진짜 매료되었던 인물은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Les Vampires의 일원인 이르마 벱이었습니다. 이르마 벱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존재였습니다. 로맨틱했지만 무자비했고 성적으로 자유로웠으며 중산층의 하녀에서부터 귀족 소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며 당시 시대가 그어놓았던 계급의 장벽을 당연하다는 듯 넘나들었던 이르마의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르마는 19세기 사람들이 악몽과 몽정이 뒤섞인 꿈 속에서 보았을 신여성의 모습일 수도 있었겠죠.

4.

모레노 일당에게 납치당한 이르마
[흡혈귀들]은 중요한 작품입니다. 작품 자체가 당시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도 대단했고 그 이후 세대 영화 예술가들에게 끼친 영향도 그 못지 않았습니다. 루이스 브뉘엘이니 프리츠 랑이니 하는 사람들의 작품에서 [흡혈귀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죠. [마부제 박사] 시리즈와 같은 작품들이 [흡혈귀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역사적 중요성은 잠시 잊기로 하죠. [흡혈귀들]은 현대 관객들이 보기에도 재미있는 작품일까요?

물론 우린 이 영화에서 현대 영화의 영상 감각을 즐길 수는 없습니다. 굉장히 구식인 영화지요. 무성 영화로도 아직 완성된 작품이 아닙니다. 카메라는 밋밋하게 고정되어 있고 속도는 종종 뻔한 대사 장면 덕택에 늘어집니다.

그러나 영화는 여전히 재미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뒤떨어진 요소들을 흥미로운 스토리 전개가 보충해줄 뿐만 아니라, 구식 무성 영화 특유의 비현실적인 느낌이 우리에게 아주 새롭고도 낯선 경험을 제공해주기도 하니까요. 적어도 저에겐 [흡혈귀들]을 보는 400분은 굉장히 빨리 지나갔답니다. (01/05/01)

DJUNA


기타등등

1. 삽입한 사진들의 색이 조금씩 다르지요? 이 영화에서는 분위기나 배경에 따라 각각 다른 색을 필름에 입히고 있습니다. 실내 장면은 갈색조, 야외 낮 장면은 초록색, 야외 밤 장면은 청색... 이런 식으로요. 당시엔 흔한 것이었지만 종종 꽤 재미있는 트릭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불을 끄면 화면이 어두워지는 대신 갈색에서 파란색으로 변한답니다.

2. 다들 아시겠지만 [장만옥의 이마 베프]에서 리메이크 하던 영화가 바로 이 작품입니다. 모레노가 이르마 벱을 납치하는 장면이 그대로 영화 속에서 재현되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