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레아 풀 Léa Pool

주연
파이퍼 페라보....폴리 오스터
Piper Perabo....Paulie Oster
제시카 파레....빅토리아 몰러
Jessica Paré....Victoria Moller
미샤 바튼....메리 브래드포드 '마우스'
Mischa Barton....Mary Bradford 'Mouse'
재키 버로우즈....페이 본
Jackie Burroughs....Fay Vaughn
그레이엄 그린....조 멘지스
Graham Greene....Joe Menzies
미미 쿠직....엘레노어 바넷
Mimi Kuzyk....Eleanor Bannet
루크 커비....제이크
Luke Kirby....Jake
그레이스 쿵....로렌
Grace Kung....Lauren
에밀리 밴캠프....앨리슨
Emily VanCamp....Allison

(스포일러가 조금 있습니다.)

폴리

파프리카 로맨스와 열정의 시대는 언제 끝난 것일까요? 언제부터 현대의 연인들은 시시한 겁쟁이들이 된 것일까요? 왜 우리는 엘리자베스 왕조의 시인들처럼 용감한 연인들의 언어를 쏟아붓지 못하는 걸까요?

듀나 시대가 아니니까요. 모든 건 흐름을 타는 법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초는 그런 감정의 폭발이 쑥스러운 시대죠. 우리 시대엔 햇빛과 장미 다발을 뿜어대는 셰익스피어보다는 연인들을 콤파스와 금속판에 비교하는 존 던이 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상실의 시대]가 눈에 뜨이는 것도 그런 시대착오적인 느낌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요새 쏟아져 나오는 동성애 관련 영화들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릅니다. 변명처럼 '코미디'를 붙이지 않으면서 정공법으로 로맨스에 뛰어든 드문 영화지요.

파프리카 줄거리를 이야기해 볼까요...

듀나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 영화의 스토리는 이런 장르에 익숙한 사람들은 보지 않아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뻔합니다.

파프리카 그래도 대충 형식은 맞추어야 하니까 짧게나마 이야기를 간추려 보죠. 영화가 시작되면 이 영화의 화자인 메리 브래드포드가 기숙학교에 입학합니다. 메리는 폴리와 토리라는 학생과 룸메이트가 되는데, 나중에 메리는 둘이 뜨거운 애인 사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폴리가 토리와 함께 침대에 있는 것이 토리의 동생한테 발각된 뒤부터 일은 틀어지기 시작하죠. 상황을 커버하기 위해 토리는 폴리를 따돌린 뒤 제이크라는 이웃 학교 남학생을 만나기 시작하고, 절망한 폴리는 서서히 붕괴되어 갑니다.

듀나 네, 참 뻔하죠. 이 영화의 원작은 수잔 스완이라는 캐나다 작가의 [The Wives of Bath]라는 소설인데, 적어도 원작의 내용은 영화보다 더 자기 개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티 하나 없이 아름다운 미샤 바튼이 연기하고 있는 메리 브래드포드는 원작에서 곱사등이입니다. 폴리의 캐릭터도 원작에서 더 황당하고 거창한 모양이군요.

감독 레아 풀과 각색자인 주디스 톰슨은 스완이 제공한 기초적인 재료를 극단적일 정도로 원형적인 스토리 안에 밀어넣었습니다. [상실의 시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스톤월 이전의 페이퍼백 게이 로맨스 소설들에서 정말 끝도 없이 다루었던 내용입니다. 스트레이트로 돌아간 애인 때문에 붕괴되어가는 로맨틱한 게이 주인공이라니... 하느님 맙소사.

파프리카 그 때문에 21세기 초라는 시대 배경이 잘 안 맞기도 하죠? 물론 토리의 반응은 요새도 꽤 당연한 것이지만, 적어도 현대 미국/캐나다의 틴에이저들은 이 영화에 나오는 학생들보다 동성애에 관대할 거예요. 요새 젊은이 문화에서 동성애는 꽤 쿨한 유행이 되기도 했으니까요. 차라리 원작에서처럼 1963년에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어땠을까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교복을 입고 나오는 영화니 시각적인 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텐데요.

듀나 그랬다면 음악이 문제가 되었겠죠. 애니 디프랑코와 같은 요새 가수들의 음악을 잔뜩 가져와 쓰고 있는 걸요.

폴리와 토리

파프리카 음악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왜 이렇게 내용이 뻔한 것일까요?

듀나 아, 그건 이 영화가 그렇게 로맨틱하다는 뜻이겠지요. 인간은 독창적인 동물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로맨틱하다고 느끼는 대상의 범위는 제한되어 있고 또 그런 극단적인 감정의 폭풍 속에 빠진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행동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로미오와 줄리엣] 클론들이 그렇게 많이 돌아다닐 이유가 있나요.

이런 영화에서 플롯의 독창성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캐릭터의 독창성 역시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요. 진짜 중요한 것은 감정이지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바로 그런 감정이 철철 흘러 넘칩니다.

덕택에 [상실의 시대]는 상당히 용감하면서도 드문 영화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전 내용이 뻔하네 캐릭터가 뻔하네 하면서 떠들어 댔지만, 과연 요새 영화판에서 폴리처럼 노골적으로 로맨틱한 캐릭터 얼마나 되겠어요?

파프리카 폴리를 보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요...

듀나 맞아요. 정말 [아델 H의 이야기]의 아델 위고가 생각나지 않나요? 폴리는 틴에이저 레즈비언 버전 아델 위고입니다. 폴리는 아델처럼 미쳤습니다. 정상인 사람이라면 여자 친구의 책상 위로 올라가 셰익스피어를 낭송하거나 애인의 남자 친구에게 펜싱칼을 던지며 구식 결투 신청 같은 걸 하지 않아요.

폴리의 이런 행동은 너무나도 극단적이고 멜로드라마틱해서 요새 이성적인 관객들에게는 기괴하게 보입니다. 거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하죠. 하지만 로맨스란 원래 예쁘기만 한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들은 그만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진짜 미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 선을 넘습니다. [상실의 시대]의 이야기는 끔찍할 정도로 멜로드라마틱하지만 폴리라는 캐릭터를 생각해보면 정확하고 사실적이며 진실되기까지 합니다.

파프리카 그러고 보니 정말 아델 위고와 닮았군요. 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건 전혀 다른 사람이었는데요.

듀나 누구요?

파프리카 [스타트렉:보이저]의 해리 킴요. 그 왜 해리가 외계인 여자랑 연애했다가 실연한 에피소드가 있잖아요. 해리는 실연의 상처를 치료하는 약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거부하죠. 차라리 그 감정을 그대로 유지하며 버티겠다고요.

본 교장이 폴리를 설득하는 장면이 비슷했어요. 본 교장은 폴리를 위로하며 "넌 도움이 필요해, 지금은 이처럼 괴롭지만 너도 언젠가 이를 극복해 낼 거야"라고 말하죠. 폴리는 처음엔 그 말을 대충 넘기려 하지만, 본 교장이 어렸을 때 자신과 거의 같은 경험을 했다는 걸 알자 말 그대로 공포에 질리고 맙니다. 폴리에게 토리에 대한 사랑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되는 것이었어요. 그건 말 그대로 폴리의 일부이기 때문에 토리에 대한 사랑에서 '치유된다면' 폴리는 더이상 폴리가 아닙니다. 폴리에게 본 교장은 결코 '생존자'가 아닙니다. 걸어다니는 시체일뿐이에요. 폴리의 마지막 행동 역시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폴리에겐 토리의 배반만큼이나 자신의 변화가 두려웠겠지요.

네, 철없고 미숙한 틴에이저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과연 그런 아이들에게 '성숙해지라고' 말할 권리가 있나요?

듀나 어떻게 보면 [상실의 시대]는 굉장히 퇴행적인 영화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시효가 끝난 구식 게이 러브 스토리를 다시 끌어온 것만 해도 그래요. 어떻게 봐도 '정치적으로 공정한'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는 없어요. 특히 많은 게이 관객들에게 "네 눈엔 내가 레즈비언으로 보이니? 아냐, 난 토리를 사랑하는 폴리일뿐이야" 운운의 외침은 즐겁지 않은 변명처럼 들릴 거예요.

파프리카 흠... 어디서 비슷한 소리를 들었더라? 아하, 바로 고명하신 쥬나 반즈 여사의 변명이 아니던가요?

듀나 망할 할망구 같으니. 툴툴... :-/

파프리카 그래도 폴리의 변명은 타당성이 아주 부족한 건 아닙니다. 폴리처럼 사랑에 빠진 사람은 결코 특정 카테고리 안에 갇히길 원하지 않을 거예요. '레즈비언'이라는 레테르가 붙는다면 토리에 대한 폴리의 사랑은 그 순간부터 교환과 대체가 가능한 일반적인 것이 되지요. 폴리의 정신 상태로는 견뎌낼 수 없는 일이에요.

듀나 파이퍼 페라보는 상상외로 강렬하게 폴리를 연기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밋밋한 역을 고려해본다면) [코요테 어글리]에서도 꽤 좋았어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페라보가 온 몸에 가득 찬 감정을 폭탄처럼 들고 다니며 하나씩 터뜨릴 때, 우린 진짜 괜찮은 젊은 배우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상실의 시대]를 이 친구의 진정한 데뷰작이라고 우겨도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닐 거예요.

토리 역의 제시카 파레와 메리 역의 미샤 바튼 역시 근사하게 캐스팅 되었습니다. 특히 전 미샤 바튼이 좋았어요. 원작에서처럼 곱사등이는 아니지만 '마우스'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그 불안하고 미묘한 표정이 어쩜 그렇게 생생하던지요.

파프리카 [식스 센스] 볼 때는 몰랐는데, 미샤 바튼은 이 영화에서 어딘지 모르게 얼굴 살 빠진 사라 미셸 겔러처럼 보이더군요.

폴리와 마우스

듀나 정말 그런 같기도 하군요. 그러고보니까 제시카 파레는 리브 타일러랑 브리짓 홀을 섞어 놓은 것 같기도 해요.

파프리카 무척 예쁜 영화라는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것도 노골적이고 사치스럽고 호사스럽게 예쁘죠. 무대가 되는 퍼킨즈 걸즈 콜리지부터가 숲 속에 숨어 있는 성채 같은 곳이니까요. 게다가 세 주인공들이 모두 아주 예쁜 사람들이고...

듀나 ...예쁜 섹스 신도 몇 개 있고요...

파프리카 전체적으로 이런 분위기는 이전의 레아 풀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저에게 레아 풀은 늘 유럽 풍의 지적인 사람처럼 느껴졌거든요.

듀나 난생 처음으로 남의 각본으로 영화를 만들었으니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죠. 처음으로 만든 영어 영화라는 것도 이유가 될 거고요. 하지만 이 영화가 풀의 이전 영화들과 과연 정말 그렇게까지 다른 것일까요? [상실의 시대]는 대책없이 로맨틱한 영화지만, 풀은 이 로맨티시즘을 꽤 기술적이고 지적으로 조종하는 듯 합니다. 적어도 저에겐 이 통속적인 트래쉬 영화가 전작 [안느 트리스테]나 [셋 미 프리]만큼 영리한 영화처럼 보인답니다.

파프리카 자, 별점을 줄 시간입니다. 별 둘 반에서 셋 반 사이가 맞겠지요. 하지만 이 막 나가는 영화에 별 셋을 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안 드는군요. 그러면 둘 반과 셋 반이 남는데, 어느 쪽이건 상관 없어요. 머뭇거리지 말고 하나 택하라고요? 전 셋 반을 주고 싶어요. (01/04/23)

D&P

기타등등

[상실의 시대]는 아주 좋은 번역제가 아닙니다. 일단 하루끼 소설 번역 제목과 똑같아서 헛갈리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특정 '시대'나 '세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니잖아요. (최근 케이블에서는 [길 잃은 천사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