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소피아 코폴라 Sofia Coppola

주연
스칼렛 요한슨....샬롯
Scarlett Johansson....Charlotte
빌 머레이....밥 해리스
Bill Murray....Bob Harris
조바니 리비시....존
Giovanni Ribisi....John
안나 패리스....켈리
Anna Faris....Kelly
타도코로 유타카....광고 연출자
Yutaka Tadokoro....Commercial director
하야시 후미히로....찰리
Fumihiro Hayashi....Charlie
카와사키 히로코....히로코
Hiroko Kawasaki....Hiroko
다이콘....밤비
Daikon....Bambie
후지 타케시....매튜 미나미
Takashi Fuji....Matthew Minami

밥과 샬롯

한동안 소피아 코폴라는 부당한 유명세의 희생자였습니다. 모두 유명한 아버지 때문이었지요. 차라리 야심도, 재능도 없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겐 가족들한테서 자극받은 야심이 있었어요. 어디에 맞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예술적 재능도 있었고요.

그 때문인지, 이 사람의 초기 경력은 매스컴의 놀림으로 장식된 고통스러운 시행착오들의 연속처럼 보였습니다. 우선 이 사람은 연기를 시도해봤습니다. 어렸을 땐 도미노라는 예명으로 이곳 저곳에 얼굴을 들이밀다 결국 아버지의 대작 [대부 3]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지요.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뉴욕 스토리]에서 아버지가 감독한 에피소드인 [조이 없는 삶]의 각본도 써봤습니다. 평은 가혹할 정도로 안 좋았지요. 그래서 영화는 내 길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사진도 배워봤어요. 그러나 이 역시 솔직히 혼란스러운 젊은이의 도피구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더 얄미운 건 그러는 동안에도 매스컴이 쫓아다니면서 아버지 덕을 보는 종이공주 취급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이 모든 수난들은 소피아 코폴라가 괜찮은 처녀 장편 [The Virgin Suicides]를 내면서 서서히 사라져갔습니다.

소피아 코폴라의 두번째 장편 [Lost in Translation]는 [The Virgin Suicides]보다 더 처녀작 같은 영화입니다. [The Virgin Suicides]는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소설을 각색한 것이지만 [Lost in Translation]의 각본은 오리지널이지요. 그리고 코폴라의 첫 장편 오리지널 각본은 많은 처녀작들이 그런 것처럼 자서전적인 느낌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물론 자서전적이라는 건 대부분 느낌 뿐입니다. 주인공 샬롯의 남편 존이 전남편 스파이크 존즈를, 존의 친구인 할리우드 배우 켈리가 카메론 디아즈를 모델로 했다는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영화가 픽션을 가면삼아 소피아 코폴라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아닙니다. 영화가 중요시하는 건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아마 샬롯이 겪는 혼란과 두려움은 소피아 코폴라가 그 나이 때 겪었을 고민과 아주 비슷할 겁니다.

[Lost in Translation]는 일본에 '갇힌' 두 미국인의 이야기입니다. 남자 주인공 밥 해리스는 200만 달러를 받고 산토리 위스키의 광고를 찍는 중년의 미국 배우입니다. 여자 주인공 샬롯은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 일본에 온 20대 초반의 여성이고요. 일본이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도 못하고 시차 때문에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들은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 일본에서 보낼 남은 며칠을 공유하게 됩니다.

20여년의 나이차가 존재하지만 사실 그들은 비슷한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밥은 인생의 반고비를 넘어오면서 자기 자신과 삶에 질리고 지쳐있습니다. 학교를 막 졸업한 샬롯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겁에 질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고요. 샬롯이 연극의 막이 올라가길 기다리고 있다면 밥은 막간 사이에 갇혀 있는 셈이지요.

보통 때 같으면 서로를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놓는 것은 도쿄라는 낯선 공간입니다. 유럽의 다른 도시였다면 그래도 그들은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을 겁니다. 다른 아시아권 국가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고요. 하지만 도쿄라는 이질적인 메트로폴리스 안에서 그들은 길을 잃습니다. 이 두 미국인들이 이상한 나라에 빠진 앨리스처럼 군다고 해서 나무라거나 놀려댈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군요. 비교적 가까운 이웃인 우리가 보기에도 일본 문화에는 당황스러울만큼 괴상한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쿄에서 이들은 일종의 멀미를 경험합니다.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세계 안을 더듬거리며 돌아다니는 동안 점점 현실감각을 잃어가는 것이죠. 그들에게 이 현대 도시는 어느 순간부터 꿈 속의 공간이 됩니다. 꿈 속에서 그러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사념을 끌고 거리낌없이 이 낯선 도시 안을 방황합니다.

이 과정 중 밥과 샬롯은 서서히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로맨스나 우정과 같은 단순한 분류가 쉽게 통하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도쿄에서 그들이 겪는 꿈결과도 같은 경험들처럼 이도 명백하게 정의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기대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그냥 자신들의 감정을 흘러가도록 몸과 마음을 맡깁니다.

[Lost in Translation]은 분명한 스토리가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사실 스토리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도 않아요. 다른 영화에서라면 꽤 중요한 극적 전환점이라고 할만한 두 주인공의 다툼은 잠시 퉁명스러운 휴지기만 만들어낼 뿐 어떤 발전도 이룩하지 못합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도 둘은 어떤 삶의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요. 솔직히 머리 쓰지 않고 아주 쉽게 각본을 썼을 거라는 의심까지 듭니다. 분명한 대사나 드라마없이 주인공들을 도쿄의 이곳저곳으로 끌고다니기만해도 되니까요.

그러나 이건 영화의 직접적인 단점이 되지는 않습니다. [Lost in Translation]은 원래부터 분명한 목적이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미로 속의 방황이고 그 방황 속에서 캐릭터들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The Virgin Suicides]에서 우리가 보았듯, 이런 섬세한 분위기를 잡아내는 재능이야말로 소피아 코폴라의 가장 듬직한 예술적 무기이기도 하죠.

소피아 코폴라가 만들어낸 불면증 환자의 꿈과도 같은 세계는 빌 머레이와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두 배우에 의해 완성됩니다. 이들의 캐스팅만 해도 영화는 반 정도 성공했습니다. 둘은 전혀 다른 개성을 가졌지만 모두 약간 현실 세계에서 어긋난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지요. 머레이가 구석에 삐딱하게 서서 졸린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요한슨은 자기만의 꿈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유하는 고립된 아웃사이더의 느낌 덕택에 이들은 아주 설득력있는 공범자들이 됩니다.

[Lost in Translation]은 소품입니다. 하지만 배꼽잡는 코미디에서부터 우울한 현실 세계의 인식까지 감정과 표현의 폭이 상당히 넓은 편이며, 달콤씁쓸한 도회적 무드에 의존하지만 감상주의를 배제한 정확한 접근법과 좋은 배우들의 호연 덕택에 영화의 성취도는 높습니다. 다들 고비라는 두 번째 영화를 코폴라가 이렇게 날씬하게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건, 앞에서도 말했듯, 이 작품이 성격상 처녀작에 더 가깝기 때문이겠지요. (04/02/11)

DJUNA

기타등등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들은 국내에 소개될 때마다 제목이 망가지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