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환경

주연
임수정....시은
박은수....익두
유오성....윤조교사
김유정....어린 시은
김기천....판돌
백일섭....노신사
권병길....황노인
최학락....김조교사
김광규....장한성 마주
박길수....마천복
오태경....철이
홍지영....민자

천둥과 시은

[각설탕]이라는 영화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가 빠져있는 다소 모순된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영화가 충무로의 제작 현실을 통해 보면 상당히 모험적인 작품이지만, 그 모험의 최종목적지가 이미 오래 전에 굳어버린 익숙한 장르 전형성이라는 거죠. 이 영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녀와 말' 영화거든요.

고로 이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도 둘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익숙한 도전을 얼마나 성공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익숙한 공식을 어떻게 재활용했느냐는 것이죠.

우선 장르 공식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죠. 내용은 다들 아시죠? 기수를 꿈꾸는 우리의 주인공 시은은 거의 엄마처럼 따랐던 암말 장군의 아들인 천둥을 애지중지 키우는데, 아빠는 딸 대학비용을 대려고 그 망아지를 팔아버리죠. 2년 뒤, 기수가 된 시은은 과천에서 홍보용 마차를 끌던 천둥과 재회합니다. 이제부터 그랑프리를 향한 시은과 천둥의 도전이 시작되는 거예요.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의 공식이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만큼 충실하게 신파 연애물의 공식을 따르고 있기도 하답니다. 남자 주인공이 말인 게 다를 뿐이지 [각설탕]은 전형적인 신파 멜로예요. 사랑스럽고 야심이 넘치고 가끔 엄청 자기중심적이 되기도 하는 여자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을 헌신적으로 따르는 과묵한 순정파 남자의 연애담이죠. 심지어 결말도 그에 맞게 짜여져 있어요. 어떻게 보면 이런 멜로물 설정의 개입은 영어권 스포츠 영화의 공식을 토착화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각본이 그렇게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일부는 멜로드라마의 설정 때문이지요. 운명의 만남이나 불운한 이별, 놀라운 우연의 일치와 같은 멜로 설정을 너무나도 충실하게 따르다보니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신 그 설정들에 갇히고 맙니다. 공식에 얽히는 건 순수한 스포츠물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내셔널 벨벳]이나 [드리머] 같은 영화들은 그 장르 내에서는 무리 없이 쉽게 흐르죠. [각설탕]의 경우는 그런 자연스러움이 없어요. 여러 요소들이 억지로 끼워져 있고 종종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가 희생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노골적인 흑백의 선악구조로 구성된 스포츠 드라마의 갈등은 후반의 멜로물이 결말을 맺는 동안 거의 완전히 무시됩니다. 그럼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했던 관객들은 절반밖에 만족할 수 없죠. 말 주인공인 천둥에게 지나친 인간적 요소를 넣어준 것도 조금은 걸리더군요. 짐승의 행동 동기가 너무 깊거나 추상적이면 설득력이 떨어지죠.

하지만 [각설탕]의 각본은 다른 일도 하고 있습니다. 아까 멜로드라마적 요소가 토착화의 도구일 수도 있다고 말했죠? 여기서 제가 덧붙이고 싶은 건 그게 유일한 토착화 도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과천 경마 세계는 영미권의 설정을 이식한 게 아니에요. 단순한 경쟁자들의 갈등에서부터 뿌리깊은 비리까지 너무나도 한국적인 곳이죠. 이 어쩔 수 없는 깡패들의 나라에서 정공법으로 성공하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 관객들에게 더 와닿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덕택에 스포츠 영화적인 부분은 예상외로 단단해요. 디테일이 풍성하고 경쟁의 드라마도 만만치 않지요. 후반의 멜로가 그 디테일을 많이 날려버리긴 하지만요.

기술적인 면에서 영화는 그냥 투박한 편입니다. 전 [그놈은 멋있었다]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환경의 일관된 스타일이나 능력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 못하겠어요. 하지만 이 영화가 시쳇말로 '웰메이드'라고 부르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합니다. 편집은 흐릿해서 종종 지나치게 일찍 절정에 오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절정의 타이밍을 놓쳐 버리죠. 연기지도도 이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고요. 하지만 이 최종결과물이 말이라는 엄청난 변수를 통과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약간 관대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배우들이 자신에게 가능했던 최선의 결과물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변명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장면들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말이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물이 거칠긴 해도 결코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어요. 단역들이 조금 얄팍하긴 하지만 박은수와 유오성은 묵직한 조역이고 임수정은 반짝거리는 스타이며 김유정은 정말 귀엽네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전 임수정의 부드럽고 귀여운 모습보다는 제 성미를 누르지 못하고 고함을 빽빽 질러대거나 아무에게나 채찍을 휘둘러 대는 모습이 더 좋더군요. 자길 인정하지 않는 시스템과 온 몸으로 맞서 싸우는 재능있는 루키 이미지에 딱이에요.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이런 역할이 몇 번 더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각설탕]은 잡탕입니다. 멜로드라마와 스포츠영화가 섞여 있고 그 안에서 성취도도 오락가락하지요. 어떤 때는 뻔한 설정이 감정의 발목을 잡고 어떤 때는 똑같은 설정이 관객들의 누선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씹을 수 있는 이상을 입에 넣은 영화이고 이야기와 주제를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영화죠. 분명 더 나아질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모험이 아니죠. (06/07/25)

DJUNA

기타등등

유오성은 여기서보니 정말 말처럼 생겼더군요. 주변 환경과 참 잘 어울리더라고요.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