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바즈 루어만 Baz Luhrmann

주연
니콜 키드먼....사틴
Nicole Kidman....Satine
유안 맥그리거....크리스찬
Ewan McGregor....Christian
존 레기자모....툴루즈-로트렉
John Leguizamo....Toulouse-Lautrec
짐 브로드벤트....해롤드 지들러
Jim Broadbent....Harold Zidler
리처드 록스버그....몬로스 공작
Richard Roxburgh....Duke of Monroth
게리 맥도널드....의사
Garry McDonald....The Doctor
자첵 코만....의식없는 아르헨티나인
Jacek Koman....The Unconscious Argentinean
매튜 위테트....사티
Matthew Whittet....Satie
케리 워커....마리
Kerry Walker....Marie
캐롤린 오코너....니니 레그-인-디-에어
Caroline O'Connor....Nini Legs-in-the-Air
데이빗 웬햄....오드리
David Wenham....Audrey
크리스틴 아누....아라비아
Christine Anu....Arabia
카일리 미노그....초록 요정
Kylie Minogue....Green Fairy

사틴

바즈 루어만은 대상의 사실적인 접근에 신경쓰지 않는 남자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늘 시대착오적이고 공간착오적이었지요. 의도적인 시대 파괴를 하지 않은 [댄싱 히어로]도 그렇게까지 사실에 충실한 영화는 아닙니다.

종종 그의 무대 경력이 그의 원래 취향에 힘을 불어넣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무대에서는 영화에서처럼 엄격한 사실 고증을 하지 않으니까요. 특히 백여년 전의 작품들을 해석만 바꾸어가며 끝도 없이 되풀이 올리는 오페라 세계에서는 그렇습니다. 50년대 파리를 무대로 [라보엠]을 연출한 사람에겐 시대 고증에 맞는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지루한 아이디어로 여겨지겠지요.

[물랑 루즈]에서 루어만은 관객들을 19세기 말의 파리로 데려갑니다. 가난한 시인과 폐병 앓는 고급 매춘부의 사랑이 물랑 루즈의 화려한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한 19세기식 연애담입니다. [라 보엠]의 남자 주인공과 [라 트라비아타]의 여자 주인공이 연애를 한다면 꼭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어요?

당연하지만 루어만은 이 19세기 로맨스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무성 영화에서부터 MTV 뮤직 비디오가 뒤섞여 있는 듯한 시각적 스타일에서부터 오펜바흐에서부터 마돈나에 걸쳐 있는 음악 선정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식으로 시대 파괴를 시도하고 있으니까요.

원론만 따진다면 루어만의 방식은 그렇게까지 도전적은 아닙니다. 제가 고증에 지나치게 충실하다고 종종 빈정거리는 영화 장르도 그렇게까지 엄밀하게 고증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뮤지컬일 경우는 더욱 그렇죠. [카멜롯]에서부터 [지지], [마이 페어 레이디]로 이어지는 수많은 뮤지컬들의 행렬을 보세요. 그들은 시대 배경에 맞추기 위해 일부러 음악적 개성을 희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영화인들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그러나 루어만의 접근법은 "남들도 했으니 나도 한다"의 단순한 시도를 넘어섭니다. 일부러 시대 착오적인 요소들을 뒤섞으며 "이걸 봐라! 재미있지!"라고 외치는 수준도 어느 정도 넘어선 듯 하고요.

물론 시대 파괴에는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습니다. 짐 브로드벤트가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을 태평스럽게 불러제끼는 장면을 보며 턱이 빠져라 웃어대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사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의 처음 절반 동안 이런 도착적 서커스를 보며 웃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가 단순한 시대 섞기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설명은 필요 없어요. 몸소 느끼게 되니까요. 웬만큼 영화가 무르익으면 니콜 키드먼이 유안 맥그리거와 함께 '웬 다이아~~~'를 불러대는 것도 그처럼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온갖 시대의 유물들이 섞여 있는 시대 도착적 세계라면 주인공들이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당연하지 않겠어요?

[햄릿]의 덴마크가 셰익스피어가 혼자 상상한 가상의 덴마크인 것처럼 [물랑 루즈]의 세계 역시 진짜 파리는 아닙니다. 몽상가들이 머리 속에서 창조한 가상의 공간이지요. 그런 꿈을 꾸는 몽상가가 21세기 초를 사는 예술가라면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경험했던 이미지와 사운드가 그가 만들어낸 파리의 환상에 섞이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스트레일리아의 세트 안에서 찍혔다는 것도 그 사실을 증명하죠. [물랑 루즈]는 고증을 충실하게 지킨 영화들보다 훨씬 솔직한 작품입니다. 완벽한 19세기를 재현하는 건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하러 자신의 상상력을 고증에 묶어두어야 하나요? 중요한 건 이야기와 감정인데 말입니다.

루어만의 감정은 그의 장기인 엄청난 비주얼을 통해 쏟아져 나옵니다. 정신없는 편집과 카메라 이동으로 MTV적이라고 쉽게 정의내릴 수도 있겠지만, 그의 비주얼은 그보다 범위가 더 넓습니다. 그의 MTV식 속도전은 할리우드 뮤지컬의 양식적 스타일에 섞여 있고 그것이 보여주는 시각적 대상들은 19세기 오페라와 보드빌의 화려함으로 장식되어 있으니까요.

아마 1950년대의 관객들이 이 영화를 접했다면 중간에 심각한 멀미를 일으켰을 겁니다. 현대 관객들이 이런 이미지의 공격에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신경을 단련시킨 것도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닙니다. 다행이죠. 50년대 관객들이라면 절충주의적 이미지의 폭격이라고 평가했을 이 정신없는 서커스에서 진짜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을테니까요. 그는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가 세상에 끌어낸 비극적 연인들의 이야기에는 진짜 감정이 담뿍 묻어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으로 영화의 반을 망쳐버렸던 그의 전작 [로미오 + 줄리엣]을 생각해보면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운이 더 좋았어요. 이 영화에는 영화를 과대 포장하는 거창한 원작도 없고 겉멋으로 승부를 거는 스타 지망생 배우도 없으니까요.

[물랑 루즈]는 [로미오 + 줄리엣] 때보다 배우들이 더 좋습니다. 전편에서와는 달리, 니콜 키드먼과 유안 맥그리거는 지극히 인공적인 이야기를 연기하면서도 둘다 진짜 연인들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키드먼의 화려한 스타성을 이처럼 완벽하게 활용한 작품은 이전엔 없었습니다. 맥그리거는 그에 비해 기가 좀 죽은 듯 하지만 원래 그가 연기한 역할이 그렇고요.

루어만은 한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던 할리우드 뮤지컬의 스펙타클을 새로운 옷을 입혀 되살려냈습니다. 기계들의 충돌과 폭발만이 스펙타클의 전부인 줄 알고 있던 현대 관객들은 이 영화를 계기로 스펙타클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지요. (01/10/30)

DJUNA

기타등등

노골적인 쿠키는 없지만 그래도 엔드 크레딧이 다 올라올 때까지 끝까지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