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본느 라이너 Yvonne Rainer

주연
캐슬린 샬팡....밀드레드
Kathleen Chalfant....Mildred
조안나 멀린....도리스
Joanna Merlin....Doris
캐더린 켈너....어린 밀드레드
Catherine Kellner....Young mildred
아이사 토마스....제니
Isa Thomas....Jenny

1.

[Film about a Woman Who...]와 같은 이본느 라이너의 전작들을 보았고 그와 비슷한 영화를 기대하고 갔다면 [살인 그리고 살인]은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이 영화가 라이너 풍의 작품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훨씬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습니다. 라이너의 영화를 이렇게 유쾌한 마음으로 보고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2.

이본느 라이너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막 동성애자가 된 60대의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도리스와 10년 연하의 대학 교수 애인인 밀드레드입니다. 도리스가 새로 시작된 동성애자의 삶과 유방암이라는 위기, 밀드레드와의 관계와 씨름하는 동안, 도리스의 죽은 엄마 제시와 틴에이저 시대의 밀드레드가 나이든 두 연인의 뒤를 따라다니며 참견하고 트집잡고 어울립니다. 감독인 이본느 라이너 자신도 턱시도 차림으로 나와 이 영화의 5번째 꼭지점을 구성하죠(그런데 이 아줌마가 언제 커밍 아웃을 했단 말이에요? 제가 알기론 이 영화가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룬 라이너의 첫번째 영화입니다.)

아마 상당히 자서전적인 내용일 겁니다. 유방암과 때늦은 커밍 아웃, 공연예술가라는 직업 등등을 보면, 도리스가 라이너의 알타 에고 쯤 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특히 이야기가 도리스의 유방암에 이른 뒤부터는 더이상 이야기를 끄집어 내기 위해 도리스를 끼워넣을 생각도 하지 않으니까요. 그 때문에 이 영화의 후반부는 유방암에 대한 상당히 긴 연설이 됩니다.

연설이 너무 많고 직접적이라는 건 아마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일 겁니다. 우린 강연을 들으러 온 게 아니라 영화를 보러 왔으니까요. 라이너가 옷을 벗고 유방이 잘려나간 자기 가슴을 드러내는 장면은 분명 충격적입니다(그 뭐라던가 하는 모델이 90년대 초에 이미 한 번 했으니 그렇게 새로운 짓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체 절단이 주는 충격은 무시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유방암과 페미니즘, 에콜로지가 뒤섞인 라이너의 연설은 불필요할 정도로 깁니다. 그런 이야기는 도리스와 밀드레드의 입을 통해서도 충분히 전달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3.

라이너의 연설이 길게 느껴졌던 가장 큰 원인은 도리스와 밀드레드에 있습니다. 이 두 아줌마의 캐릭터 묘사가 놀랄만큼 매력적이고 생생하기 때문에(그리고 조안나 멀린과 캐틀린 샬팡이 아주 근사하게 연기해냈기 때문에,) 사실 관객 입장에서 방해받기가 싫거든요. 그 아줌마들을 더 보고 싶은 겁니다.

라이너의 실험적 요소들이 가장 빛을 발하는 것도 라이너가 정치적이 되었을 때보다 도리스와 밀드레드의 관계를 다각도로 조망할 때입니다. 유방암이라는 소재가 가장 잘 와닿는 때도 라이너가 긴 유방암 연설을 할 때가 아니라 도리스가 밀드레드에게 "내 갈비뼈에 네 가슴이 느껴져"라고 말할 때인 것 같고요. 유방암 통계 이야기도 도리스와 밀드레드가 그걸 가지고 농담 따먹기를 할 때가 더 재미있습니다.

제시와 어린 밀드레드도 단순히 초현실적인 코러스라고 몰아 붙이기엔 캐릭터 묘사가 아주 훌륭하며 도리스와 밀드레드만큼이나 재미있습니다. 제시와 밀드레드에게 조금 더 공간을 주었다면 후반부가 덜 허전했을 거예요.

처음엔 라이너가 그렇게 노골적인 직설법에 매달린 게 그 사람이 정말로 화가 나서 절제를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죠.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또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적이고 친근감 넘치는 두 (네) 명의 캐릭터가 중심에 놓이다보니 [살인 그리고 살인]은 라이너의 어느 영화보다도 덜 전위적이고 덜 머리를 쓰게 만드는 영화가 되고 말았어요. 수많은 비사실적인 트릭들이 언제나처럼 쓰이고 있지만 이 인물 중심의 이야기에서는 거의 우디 알렌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후반부의 연설은 이런 온화함을 참지 못한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뭣하러요? 가끔 이런 온화한 영화를 만들어도 목숨엔 지장이 없을텐데. (98/11/15)

D&P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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