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raserhead (1977)

데이빗 린치는 1946년 몬타나의 미술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리서치 과학자여서 이사를 꽤 많이했던 모양이더군요. 어렸을 때는 이글 스카웃 단원이었다고 해요. 꽤 건전하고 모범적인 아이로 자랐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에 린치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미술이었습니다. 실제로 여러 예술 학교를 오가면서 화가로 교육을 받았고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몇 편의 단편 영화들을 찍기 시작했죠.

린치의 첫번째 장편은 5년 동안 끙끙거리며 만든 흑백영화 [이레이저 헤드 Eraserhead (1977)]였습니다. 이 고약한 영화는 78년에 심야 영화로 개봉되면서 엄청난 컬트 팬들을 끌어모았습니다.

린치의 경력은 그 뒤로도 꽤 잘 풀려갔습니다. 이 영화를 좋게 본 멜 브룩스가 그에게 [엘리펀트 맨The Elephant Man (1980)]의 감독을 제안했거든요.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고 린치에게 주류 감독의 명성을 제공해주었습니다. 그 뒤에 나온 그의 유일한 블록버스터 영화 [사구 Dune (1984)]는 흥행면에서 대실패작이었지만 2년 뒤에 나온 [블루 벨벳 Blue Velvet (1986)]은 그에게 컬트 거장의 명성을 돌려주었습니다. 그 뒤에 나온 텔레비전 시리즈 [트윈 픽스 Twin Peaks (1990)]의 성공은 린치의 이름을 현대 미국 대중 문화의 한 페이지에 영구히 박아버렸습니다. 물론 같은 해에 나온 [광란의 사랑 Wild at Heart]이 칸느를 정복한 것도 언급해야겠죠?

그러나 [트윈 픽스]는 슬럼프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트윈 픽스]가 떨어진 시청률 때문에 퇴진한 뒤로 그는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트윈 픽스: 불이여 나와 함께 걷자 Twin Peaks: Fire Walk with Me (1992)]는 몇몇 골수 [트윈 픽스] 팬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이고, 연달아 시도한 텔레비전 시리즈 [On the Air (1992)]와 [Hotel Room (1993)]은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고 보면 텔레비전은 은근히 가혹한 경향이 있습니다. 영화처럼 느긋하게 검증할 기회를 주지 않으니까요.) 린치 본류로 돌아간 [로스트 하이웨이 Lost Highway (1997)]는 몇몇 팬들과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그의 이전의 명성을 돌려주기엔 부족했습니다. 슬슬 린치는 과거의 거장이 되어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99년부터 사정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건전한 (그래서 은근히 괴상한)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 The Straight Story (1999)]가 비평적 성공을 거둔 것이죠. 텔레비전 시리즈에 대한 그의 마지막 집착은 퇴짜맞은 시리즈를 영화로 뜯어고친 [멀홀랜드 드라이브 Mulholland Drive (2001)]로 다시 태어났는데, 이 영화는 지난해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이며, 린치 미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그의 성공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린치는 다시 찾아온 부흥기를 마음껏 즐기는 중입니다. 올해는 칸느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으로 발탁되었다더군요.

2.

Twin Peaks (1990)

자연인 데이빗 린치는 단정한 옷차림과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사람들을 사랑하는 얌전하고 친절한 남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세계는 광포한 폭력과 섹스, 풀려난 악귀들이 득실거리는 악몽의 왕국입니다.

흥미로운 아이러니죠? 하지만 충분히 설명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린치는 얌전한 남자지만 우리 눈엔 그가 그렇게까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정상적으로 보이기엔 지나칠 정도로 모범적이고 정돈되어 있지요. 몇십년 동안 목까지 단추를 채운 단정한 차림으로 매일 같은 식당에서 같은 메뉴를 주문해 먹었다는 그의 괴벽은 단순한 쇼맨십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봅시다. 린치처럼 비정상적으로 정돈된 정신 세계를 가진 한 남자가 우리의 보통 세계를 보는 관점은 어떨까요? 당연히 우리 세계의 폭력성은 과장되어 보일 것입니다. 정돈과 모범의 끝에 선 그 자신이 품고 있는 환상 역시 그만큼이나 과장되어 있을 것이고요. 보통 사람들이 어중간한 중간에 서서 어정쩡한 타락과 어정쩡한 정상성 사이를 오가는 대신 데이빗 린치와 같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극단을 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작품이 종종 실수로 매음굴에 들어간 보이 스카웃 소년단원의 모험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린치의 영화에서 그런 대립은 쉽게 찾아볼 수 있죠. [트윈 픽스] 시리즈의 데일 쿠퍼 요원, [블루 벨벳]의 주인공 제프리,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주인공 베티는 모두 같은 종류의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깔끔한 주인공들이 컴컴한 세계를 들여본다는 설정 때문에 린치가 그리는 섹스와 폭력은 은근히 소년다운 열광을 품고 있기도 하죠. 앞에 언급한 보이스카웃 소년이 겁에 잔뜩 질려 집으로 달아났다가 집에서 꾼 꿈 쯤 된다고 할까요?

3.

Blue Velvet (1986)

데이빗 린치는 독특한 스토리텔러입니다. 그는 인상적인 등장인물, 흥미로운 설정, 매력적인 미스터리를 만드는 데 상당한 재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짜임새 있는 플롯의 구성에 무관심하고 미스터리의 해결에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그토록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계속 텔레비전 시리즈에 매달렸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영화보다 텔레비전에 더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결말을 만들지 않고 무조건 끌어가는 연속극에 말이에요.

시간 제한이 있는 장편 영화에서 그는 종종 줄거리를 포기해버렸습니다. 그의 많은 영화들 중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원작이 있는 [엘리펀트 맨]과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스트레이트 스토리]만이 제대로 된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다른 영화들은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 앞뒤 안맞는 스토리의 이상한 연결들로 짝지어져 있죠. [사구]가 망한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원래부터 장황한 이야기라 짜임새 있는 각본이 필수적인데, 감독은 스토리가 어떻게 나가건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까요.

린치의 부조리한 세계는 생각만큼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이성적인 체계로 설명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린치 영화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짜맞추려고 노력해도 구멍이 남을 수밖에 없어요. 린치의 영화는 꼭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린치는 목적지로 관객들을 인도하기 위해 미로를 만든 것이 아니라 미로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미로를 만든 것이니까요. 그는 상당히 솔직한 예술가입니다. 내용 모두가 이성적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감각적인 예술인 영화가 할 일이 뭐가 남습니까?

린치가 화가로 교육 받은 비주얼 아티스트였기 때문에 이런 부조리한 스토리가 그에게 더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대 회화에서 현실을 파괴해 재조립하는 작업은 당연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의 영화들은 관객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훌륭한 시각적 스타일을 잔뜩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관객들과 비평가들이 린치의 솔직담백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관객들은 설명을 요구했고 비평가들은 설명을 하려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린치의 영화들은 뭔가 심오한 의미를 담은 '고급' 예술 작품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슬럼프 중에는 괜히 잘난 척하는 가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린치 자신도 자신과 그들이 만든 함정에 빠지곤 했습니다. 90년대 이후 그의 영화들은 종종 자기 패러디처럼 보였습니다. 그만큼이나 그가 장기로 내세웠던 기괴함의 자극은 만들어내기 쉬웠고 그만큼이나 반복되기도 쉬웠던 것이죠. [로스트 하이웨이]가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싶어요. 여전히 흥미로운 영화지만 이 작품은 린치 자신의 영화라기 보다는 린치 영화를 흉내낸 영화처럼 보입니다. 아마 공동 각본가인 배리 기포드가 지나치게 린치 영화가 되려고 신경을 썼기 때문이겠죠.

4.

Mulholland Dr. (2001)

데이빗 린치는, 이해 불가능한 괴상한 영화들을 연달아 만들어낸 남자 치고는 우리 세대의 문화에 끼친 영향이 상당합니다. 우선 그는 모범적인 인디 영화인입니다. 그것도 꾸준히 아카데미 후보자 명단에 오르고 할리우드의 지속적인 윙크를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괴상한 세계를 고집하는 예술가지요. 그가 성공하건, 실패하건 그런 그의 위치는 언제나 목표로 삼을만했습니다.

그가 평론가들의 격찬을 받으며 만든 이해불가능한 영화들은 단선적인 스토리 라인과 사실주의에 고착되어 있던 할리우드 영화에 숨통을 뚫어주었습니다. 여전히 린치 같은 감독들은 드물지만 린치가 77년에 [이레이저 헤드]를 낸 뒤로 미국 영화의 표현 범위는 아주 넓어졌습니다. 현대 미국 영화의 폭력과 섹스의 표현 방식 역시 린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타란티노의 영화 [저수지의 개]에서 경관의 귀가 잘리는 장면은 당시 퇴물 취급을 받던 린치의 영향이 은근히 지속적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는 9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의 위상을 바꾸었습니다. 일급의 영화인들이 당연하다는 듯 텔레비전 시리즈에 출연하고, 크리스 카터나 조스 위든과 같은 시리즈 크리에이터들이 스타 대접을 받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올릴 수 있게 된 최근의 환경은 모두 린치가 [트윈 픽스]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90년대의 가장 중요한 시리즈인 [엑스 파일]에게 [트윈 픽스]가 준 영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많은 영향력 있는 대중 예술가들처럼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동시대 사람들에게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90년대 미국 시청자들이 좋은 커피와 체리 파이의 소박한 미덕을 재발견한 것도 데이빗 린치의 중대한 공로 중 하나입니다. (02/01/18)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