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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이름 문제부터 처리하고 넘어가죠. 이건 바다 건너 사람들도 종종 실수하는 건데,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라는 이름 중 '스코트'는 미들 네임이 아니라 성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스코트'와 '토머스'가 종종 하이픈으로 연결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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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는 1960년에 해군 비행 장교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5살 때 비행기 사고로 죽었고요. 얄궂게도 역시 해군 장교였던 의붓아버지도 73년에 같은 사고로 죽었다는군요.

스코트 토머스가 첫 연기 교육을 받은 곳은 런던에 있는 Central School of Speech and Drama라는 곳이었습니다. 별로 좋은 학생은 아니었대요. 그 학교의 모 선생은, 배우로서의 자질이 없으니 딴 길을 찾으라고 했더라나요. 실망한 스코트 토머스는 19살 때 학교를 관두고 프랑스로 가서 오 페어 걸 au pair girl 노릇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여기서부터 스코트 토머스의 진짜 경력이 시작됩니다. 스코트 토머스가 일하고 있던 집주인이 드라마 스쿨의 오디션을 제안했고 그게 그만 떡하고 붙은 거죠. 그녀는 파리의 Ecole Nationale des Arts et Technique de Theatre에서 다시 본격적으로 연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심심풀이로 야간반을 듣고 있었던 장래의 남편을 만난 곳도 그 곳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연극과 텔레비전 쇼(이 중 [Mistral's Daughter]는 우리나라에서 [지중해의 딸]이란 제목으로 방영된 적 있습니다)에 출연하며 배우 경력을 시작한 스코트 토머스에게 첫번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프린스의 [Under the Cherry Moon (1986)]의 여주인공 역으로 발탁된 것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Under the Cherry Moon]은 혹평을 받았고 스코트 토머스도 마찬가지였죠. 그녀는 그 영화로 라즈베리 여우주연상을 타는 불명예를 안아야만 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녀의 경력은 찰스 스터리지의 [A Handful of Dust (1988)]로 구제받았습니다. 이 영화의 브렌다 역은 여러모로 흥미있는데, 우리가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라는 배우를 생각할 때 척 떠올리는 바로 그 이미지를 창조한 역이었기 때문이죠. 이 역으로 그녀는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유럽에서 다양한 국적의 영화에 출연하며 경력을 쌓았는데,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그 사람의 이름을 알린 작품은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Four Weddings and a Funeral (1994)] 이었습니다. 한 동안 '휴 그랜트와 같이 나온 여자'로 알려져 있던 그녀를 공식적인 '스타'로 만든 영화는 물론 [잉글리쉬 페이션트 The English Patient (1996)]였고요.

2.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는 매우 영국적인 배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배우의 예민한 영국식 얼굴과 헨리 히긴즈에게 발음교습을 해주어도 될만큼 또렷한 영국식 악센트, 누구라도 속물적인 중상 계층의 영국 여자로 보는 그 묘하게 얄미운 세련됨 같은 것들을 보면 당연하다고 해야겠지요.

그런 스테레오 타입은 이 배우의 경력과 기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스코트 토머스는 파리에서 연기 교육받았고 프랑스에 살고 있으며 프랑스 영화가 필모그래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배우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도--Mr. Showbiz 사람들의 표현입니다만--'오이 샌드위치'보다 '피시 앤 칩'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런 스테레오 타입에 짜증이 나는지, 스코트 토머스는 틈만 나면 자기는 이런 '영국 장미'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떠들고 다닌답니다.

사실 이런 스테레오 타입은 종종 스코트 토머스의 역할을 제한하는 담이 되었습니다. 스코트 토머스한테 날아드는 역 중 상당수는 인류학자 아무개, 교수 아무개 따위로, 그 사람의 그 차가운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이미지가 효율적으로 이용될 때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라는 배우가 가장 빛을 발한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이미지를 표면적으로 이용하면서도 속으로는 살짝 배반해야 한다는 거죠.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3번째 결혼식 때 피오나가 찰스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장면을 보세요.

그 장면의 심리 묘사는 그렇게 깊이있게 씌여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코트 토머스가 외면의 냉소와 내면의 좌절이 서서히 자리 바뀜을 해가는 과정을 자기 식으로 너무나도 미묘하게 연기했기 때문에 결과는 감동적입니다.

[A Handful of Dust]에서 브렌다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유명한 장면 역시 비슷한 테크닉이 쓰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브렌다는 이 장면에서 그냥 노골적으로 슬퍼하는 대신, 그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기 거부하며 지금까지 자신을 보호해주었던 허식과 냉정함의 가면을 필사적으로 뒤집어 쓰면서 내면의 비참함을 감추려 합니다. 이 역시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가 단지 상류사회 사람들의 속물적인 제스처에 도가 튼 배우일 뿐만 아니라, 인간 감정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 감정을 기술적으로 명민하게 표현해 낼 줄 아는 배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죠.

이런 특징이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를 '불륜 전문 배우'로 만든 것도 사실입니다. 진정한 데뷰작이라고 할 만한 [A Handful of Dust]의 브렌다부터가 그런 역이었지요. 가장 유명한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의 영화인 [잉글리쉬 페이션트]도 그랬으며 최근작인 [호스 위스퍼러 The Horse Whisperer]도 그랬고 [육체와 영혼 Body & Soul]도 그 주제를 살짝 변주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불륜을 가장 훌륭하게 연기해내는 배우들은 영국식의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배우들인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밀회 Brief Encounter]의 실리아 존슨이겠지요. 겉보기부터 로맨틱하거나 육체에 종속된 것처럼 보이는 배우들이 그런 역을 한다면 아무런 서스펜스도 발산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실리아 존슨이나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와 같은 사람들이 불륜의 주인공을 연기한다면 그 규칙을 깨는 사랑의 강렬함과 죄의식이 훨씬 강하게 표현됩니다. 강렬할 뿐만 아니라 사실적이기도 하지요.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감추는 데 능숙한 사람들은 그 차가운 표면 위로 그 갈등을 살짝 띄워 올리는 데도 능숙하기 마련입니다.

3.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의 사생활은 별로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학교에서 만난 산부인과 의사랑 결혼해서 애 둘 낳고 살고 있죠. 스캔들 같은 건 아직 들어본 적이 없군요.

한동안 모델이었다가 요새는 배우 일을 하는 동생이 있습니다. 세레나 스코트 토머스라는 배우인데,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언니의 남편 역을 했던 콜린 퍼스와 미니 시리즈 [노스트로모]에서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 역을 연기한 그 많고도 많은 배우들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99/01/19)

D&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