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샘 닐은 1947년 9월 14일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6살 때 가족이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고요. 캔터베리 대학과 빅토리아 대학을 다녔고, 그 뒤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뉴질랜드 영화계에서 배우, 감독, 편집자, 작가 기타 등등 온갖 일을 다했습니다.

그가 출연한 최초의 중요한 영화는 [Sleeping Dogs (1977)]이었습니다. 근 미래를 무대로한 이 폭력적인 작품은 뉴질랜드에도 상업 영화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질리언 암스트롱의 [My Brilliant Career (1979)]에 출연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 뒤로 영국으로 옮겨간 그는 제임스 메이슨의 '비호' 아래에서 국제적인 경력을 이어갔습니다. 그 뒤로 정말 온갖 영화에 크고 작은 역으로 나오고 있는 중이지요. 최근엔 영화 백주년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뉴질랜드 편을 감독하기도 했고요.

2.

샘 닐은 숨겨진 자석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렇게 눈에 뜨이는 사람도 아니고 엄청나게 눈에 뜨이는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닐을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희 역시 한 동안은 그랬고요.

그런데 한참 영화를 보고 돌아다니다보니 이상하게도 이 사람이 나오는 영화를 많이 보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오는 영화들 중 인상 깊은 것들을 모아서 연구해보았어요. 공통점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희가 샘 닐의 얼굴을 그렇게 자주 보게 된 건 그와 공연하는 배우들 때문이었습니다. 주디 데이비스, 홀리 헌터,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 메릴 스트립, 이자벨 아자니, 심지어 안나 파퀸까지... 저희가 좋아하는 여자 배우들은 다 어떻게든 샘 닐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주연한 영화에서 공연한 상대 배우 쪽이 더 기억에 남는다면 대부분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샘 닐의 경우 그건 칭찬입니다. 샘 닐은 단순히 눈에 뜨이지 않는 배우가 아니라 상대 배우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그들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 작고한 제럴드 무어 영감님이 떠오릅니다. 무어 영감님이 피셔-디스카우나 슈바르츠코프의 그늘 아래서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주었던 것처럼, 닐은 주디 데이비스나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의 밑에서 그들을 받쳐주었던 것이죠.

이는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입니다. 오히려 정면에 서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죠. [호스 위스퍼러 The Horse Whisperer (1998)]를 예로 들어보죠. 이 영화의 공식 커플은 로버트 레드포드와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였지만, 정작 스코트 토머스가 진짜 근사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때는, 레드포드가 옆에 있을 때가 아니라 샘 닐과 함께 있을 때였습니다. 그가 스타의 에고를 휘두르는 대신 조용히 상대방의 연기를 살려주었기 때문이지요.

3.

여자 배우들의 '반주'를 해줄 때는 대부분 조용하고 점잖은 연기로 일관하는 닐이지만, 혼자 설 때는 좀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건 그의 묘하게 이중적인 외모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점잖고 사람 좋은 얼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이상하게 야비하고 거의 무서워보이기까지 하거든요.

그래서인지, 그는 악역도 상당히 많이 했고 호러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습니다. 사실 샘 닐이라는 배우의 카리스마를 제대로 느끼려면 호러 영화들을 보아야 합니다. [오멘 3 The Final Conflict (1981)], [매드니스 In the Mouth of Madness (1994)], [이벤트 호라이즌 Event Horizon (1997)]과 같은 영화들 말이지요. [매드니스]를 제외하면 모두 아주 잘되었다고 할 수 없는 영화들이었지만, 샘 닐의 정신나간 괴기함은 흥미로웠습니다. 저희가 닐을 좋아한다면 그건 그의 반주자적 자질 때문이지만, 그는 호러 배우로 기억에 남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줄 때는 양쪽 모두를 취할 때입니다. 그는 그의 후견인이었던 제임스 메이슨과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온화한 외모와 위험한 성격의 결합 말이지요. 그가 [피아노 The Piano (1994)]에서 보여준 연기를 한 번 보세요. 결코 보기만큼 쉬운 연기도, 간단한 연기도 아니었습니다. 아직까지 그는 메이슨과 같은 카리스마는 없지만... 또 모릅니다. 정말 메이슨과 같은 연기를 그가 해낼지. 시간은 많으니까요. (99/11/03)

D&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