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얀 쯔반크마이어 Jan Švankmajer

주연
크리스티나 코호토바....앨리스
Kristyna Kohoutová....Alice

1.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공포스러운 작품이 아닙니다. 정신나간 캐릭터들이 괴상한 행동을 하고 돌아다니긴 하지만 그들이 뱉어대는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패러독스와 넌센스들을 삼키다보면 그런 광기는 오히려 쾌활하게 느껴지죠. [앨리스]를 읽으면서 '애들한테는 무섭겠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그러나 [앨리스]를 보면서 악몽을 꾸는 아이들은 존재합니다. 끝없는 추락과 "목을 쳐라!"라는 명령을 입에 달고 다니는 하트 여왕, 다양한 기형적인 괴물들, 출구없는 지하 세계는 분명 악몽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 악몽만을 끄집어내어 영화로 만들 법도 합니다. 캐롤의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보다 이게 더 '영화적'이기도 할테고요.

2.

얀 쯔반크마이어가 그의 처녀 장편 [앨리스]에서 한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처녀 장편이라지만 이 영화는 87년도 작품입니다. 애니메이터로서의 그의 화려한 경력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늦은 편이지요.

쯔반크마이어의 [앨리스]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입니다. 크리스티나 코호토바라는 아역 배우가 앨리스를 맡아 쯔반크마이어가 창조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거죠.

[앨리스]의 스토리만 보면 영화는 원작에서 그렇게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앨리스는 하얀 토끼를 쫓다가 지하 세계로 떨어져 다양한 미친 괴물들을 만납니다. 체셔 고양이나 못생긴 공작 부인과 같은 캐릭터들이 빠져 있고 약간의 상황이 틀어져 있기는 하지만 심한 개작은 없습니다. 디즈니의 애니매이션 버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비교해도 차이는 별로 없어요. 오히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뒤섞고 독자적인 캐릭터들을 창조해 넣은 디즈니 버전이 원전에서 더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이 온화한 각색에 비주얼의 살이 입혀지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스토리 라인이 원작에 상당히 충실하기 때문에 비주얼의 일탈이 더 심해 보입니다.

쯔반크마이어의 작품들에 익숙한 분들은 그가 만든 세상이 어떤 곳인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쯔반크마이어의 앨리스가 떨어진 세계는 원작에 나오는 초여름 햇살을 담뿍 받은 전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곳은 낡은 문과 열리지 않는 서랍, 동물 박제와 해골, 못이 박힌 빵으로 가득 찬 낡고 어두운 건물입니다.

그리고 그 안을 채우는 캐릭터들은 정말로 소름 끼칩니다. 하얀 토끼는 진열장을 가위로 깨고 뛰쳐나온 박제입니다 (그는 가슴의 뜯어진 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톱밥이 묻은 시계를 몸 안에서 끄집어냅니다.) 애벌레는 핏발 선 의안과 의치로 무장한 낡은 양말이고 3월 토끼는 눈이 떨어져 가는 낡은 인형이며 도어마우스는 살아 움직이는 여우 목도리입니다. 심지어 앨리스 자신도 괴상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앨리스는 몸이 줄어들 때마다 구식 자기 인형으로 변합니다. 이런 인형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해보이는지는 여러분도 아실 거예요.

쯔반크마이어의 이상한 나라를 더욱 섬뜩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 전체에 깔려 있는 붕괴된 느낌입니다. 그가 원작의 텍스트를 다루는 방법에서 그런 느낌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캐롤의 원작이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은 미치광이들이지만 그래도 자기가 무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는 미치광이들입니다. 그들은 괴상하지만 생기발랄하고 팔팔하게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쯔반크마이어의 영화에 나오는 이상한 나라 주민들은 거의 죽어 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의 절반 이상이 박제와 해골들입니다. 그네들의 행동은 기계적이고 의식이 없습니다. 그들은 캐롤이 만든 대사를 그대로 읊고 있지만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목을 잘라대는 하트 여왕도 보기가 불편하지만, 그런 끔찍함이 극에 달하는 장면은 '미친 티 파티'입니다. 죽어가는 연금수령자처럼 낡은 방에 갇혀있는 3월 토끼와 미친 모자 장수는 끝도 없이 테이블을 빙빙 돌며 같은 동작을 반복합니다. 3월 토끼는 끝도 없이 시계에 버터를 바르고 미친 모자 장수는 끝도 없이 차를 마십니다. 그들이 하는 소리는 미친 소리가 아닙니다. '자리가 없어!'나 '머리를 잘라야겠구나'는 헛소리가 아니라 의식없는 기계적 음향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시체들입니다. 이쯤 와서는 도대체 겁이 없어 보이던 이 영화의 앨리스도 두려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밖에 없죠.

3.

쯔반크마이어의 이상한 나라는 매우 체코 풍입니다. 적어도 그의 세계는 우리가 카프카나 하셰크, 차펙과 같은 작가들의 책에서 읽어왔던 바로 그런 세계의 기괴한 확장입니다. 수백 년 동안 끝없이 엔트로피를 생산하며 몸을 불려가는 관료주의 체제와 그 안에 기생하는 뻣뻣한 관료들을 상상해 보세요.

쯔반크마이어의 [앨리스]는 캐롤보다는 카프카에 가깝습니다. 그가 영화 속에서 사용하는 소도구들을 보세요. 언제나 손잡이가 떨어지는 서랍, 앨리스가 마시는 잉크,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은 편지... 앨리스는 문 대신 서랍 안으로 들어가고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쯔반크마이어는 언제나 자신의 작품들 중 정치적이 아닌 작품은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그렇다고 순진하게 [앨리스]에서 80년대 말의 체코 사회상을 읽어내려고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오랜 세월 동안 체코라는 나라의 성격을 형성해왔던 어떤 사회적 분위기 정도 쯤은 읽어낼 수 있을 거예요.

4.

크리스티나 코호로바는 예쁘고 (엠마누엘 베아르가 젖살 붙은 어린 아이였을 때 꼭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아요) 외모도 앨리스에 잘 맞습니다. 쯔반크마이어는 코호로바에게 많은 연기를 시키지 않는데, 그래서인지 그 아이의 인형같은 분위기가 더 강조되어 주변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상당히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저희가 본 버전은 영어 더빙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아요. 이 영화엔 진짜 대사가 없거든요. 코호로바의 나레이션으로 스토리를 끌어가는 형식이지요. 영어 더빙판에서는 카밀라 파워라는 영국 아가씨가 더빙판을 담당하고 있는데 아주 자연스럽습니다(오히려 앨리스가 체코어를 했다면 더 이상했겠죠.) 단지 [록키 호러 픽쳐 쇼] 식 입술 클로즈업이 많아서 입술과 대사가 따로 노는 게 보여요. (99/05/05)

D&P

기타등등

과연 이 영화를 애들한테 보여주어도 될까요?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는 안되겠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먹은 아이들은 오히려 더 재미있게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종종 아이들의 문화적 수용능력을 경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