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안병기

주연
김규리....예진
최정윤....선애
하지원....경아
유준상....정욱
유지태....현준
정준....세훈
조혜영....미령
장인환....노인
송병준....법정남
윤현숙....교수
최성웅....형사
장수진...어린 경아
김주연....어린 예진
이정우....미령 상대남

(스포일러가 있지만 신경쓰실 필요 없어요.)

경아와 예진

한국 영화계에서 안병기의 가장 큰 미덕은 그가 야심없는 평범한 장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쓸데없이 예술을 하려는 남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알고 있고, 할 줄 아는 선 안에서 좋은 장르 영화를 만들려고 할 뿐이지요. 물론 그 미덕은 쉽게 단점으로 연결되기도 하는데, 그가 지금까지 만든 두 편의 호러 영화인 [가위]와 [폰]은 그 장단점이 모두 드러난 작품이었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그의 차기작인 [폰]은, 덜컹거려도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전작이 불러일으킨 기대를 충분히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가위]는 두 가지 호러 영화의 서브 장르에서 선을 하나씩 끌어오고 있는 작품입니다. 첫번째 선은 동양 관객들에게 익숙한 (그렇다고 우리가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혼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까지만 해도 현대 호러 장르 영화의 거의 유일한 선택처럼 보였던 미국식 슬래셔 무비입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젊은 사람들을 잔인무도하게 학살하는 원혼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진, 선애, 정욱, 현준, 세훈, 미령은 '어 퓨 굿 멘'이라는 대학의 엘리트 서클 멤버들입니다. 우연히 만난 근로장학생 은주에게 호감을 느낀 예진은 은주를 서클에 가입시키는데, 알고 봤더니 은주는 예진과 어렸을 때 친구였고 당시 마을에서 악령에 들린 아이로 여겨졌던 경아였습니다. 진상을 안 예진에게 거부당한 경아는 자살하고, 2년 뒤 '어 퓨 굿 멘'의 멤버들은 경아의 유령에게 한 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곧 이 영화에 영향을 준 작품들을 하나씩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링]의 영향은 노골적입니다. 머리칼로 얼굴 가린 여자 유령이 나오고, 캠코더 화면에서 유령의 손이 뻗어나오니까요. 한 사람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일단의 젊은이들이 복수의 대상이 된다는 건 [프롬 나이트]나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의 설정을 살짝 개조한 것과 같죠. 주인공인 김규리의 캐릭터는 이전에 출연했던 [여고괴담]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원귀인 경아와 주인공 예진의 관계는요. [여고괴담]의 얌전한 우정이 미치광이 살인마 레즈비언 유령의 집착으로 옮겨졌을 뿐이죠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논의는 건너 뛰기로 하겠습니다. :-P)

이 영화에서도 안병기는 호러 영화를 위한 좋은 아이디어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캠코더에서 튀어나오는 손처럼 뻔한 [링]의 인용도 직접 보면 상당히 창의적인 개작입니다. 악령에 들린 소녀인 경아는 위협적이고 무시무시한 괴물이고요. 전 특히 'Living Dead Doll'의 유령 버전처럼 보이는 어린 경아를 좋아합니다. 뒤집혀진 버스에서 피투성이 얼굴로 걸어나오는 모습이나, 책상 뒤에서 쑥 나와 다짜고짜 연필을 칼처럼 휘둘러대는 모습이나, 모두 정말 그럴싸해요. 하지원이 연기하는 성인 경아도 괜찮습니다. 가끔 분장과 의상이 노골적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가위]는 진짜로 효과적인 드라마를 연출해내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의도적이었을 거예요. 안병기에겐 간단한 설정 속에서 벌어지는 피투성이 살육을 스타일리쉬하게 그려내는 것 이상의 의도는 없었을테니까요. 물론 살육이 먼저이고 드라마는 나중이어야지요.

그러나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투성이 살육도 나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 날이 선 호러물의 이야기는 드라마와 심리적 기반이 바탕에 섰다면 더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예진에 대한 경아의 사랑이 조금 더 잘 묘사되었다면, 경아가 벌이는 살육이 보다 드라마틱하고 처절해지지 않았겠어요? 영화 속에서는 동기들이 주사위처럼 툭툭 던져진 것에 불과하거든요.

더 큰 문제는 영화의 리듬과 호흡입니다. 안병기는 쓸만한 아이디어들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효과적으로 짜맞추지는 못해요. 호러 효과들은 모두 만족스러울 정도로 자극적이지만, 이들은 유려하게 흘러가며 관객들을 통제하는 대신 덩어리져서 그냥 하나씩 떨어집니다. 그 때문에 영화는 후반으로 넘어갈수록 난잡해보이고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작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이 영화는 여전히 [폰]보다 낫습니다. 대사는 멋없지만 [폰]보다는 훨씬 덜 어색하고, 연기는 피상적이지만 배우들은 더 잘 캐스팅되어 있습니다. 스토리는 밋밋하고 반복적이지만 그럭저럭 먹히고, 얄팍한 캐릭터 설정은 어쩔 수 없지만 경아의 원귀는 여전히 좋은 호러 괴물입니다.

안병기의 차기작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정말 끝도 없이 하는 말이지만, [폰]은 실망이었거든요. 그래도 안병기가 안정된 장르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노련한 장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런 영화들이 나온다고 해도 제가 그 작품들을 목매달고 좋아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그런 작품들은 '예술하는 걸작들'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할 겁니다. (04/02/02)

DJUNA

기타등등

1. 영화에 나오는 비디오 등에는 '어 퓨 굿 멘'이 'A Few Good Man'으로 표기되어 있더군요.

2. 안병기는 혹시 에드거 앨런 포우의 팬이 아닐까요? 두 영화 모두 노골적인 [검은 고양이]의 인용을 담고 있으니 말이에요.

3. 다음 주에 다룰 2000년 한국 호러 영화는 [해변으로 가다]입니다.